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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10 한국 팝의 사건사고 - 2. "음악에는 만능선수" 김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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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사건사고 - 2. "음악에는 만능선수" 김해송

②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조선 짜스의 귀재’


현인, 박단마 등이 부른 ‘베사메 무초’ ‘슈샤인 보이’ 같은 곡이 ‘진짜 재즈’가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자스’는 ‘짝퉁’이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여기서 ‘복습 겸 예습’으로 잠시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오색찬란한 네온싸인 속으로 흘러나오는 째쓰… 쎈티멘탈한 류행가의 멜로듸에 33년의 세모는 그 긔분을 심각케 하였다” “근대 음악의 꼿이오 경쾌무비한 조률(調律)로서 흥분과 감격을 한업시 주게 되는 짜스” “대중오락의 인기를 독차지하다십히 하는 째스의 경쾌하고도 유모어한 리슴.”(차례로 <매일 신보> 1933년 12월 29일치, 1937년 1월 20, 22일치)

‘1930년대에 이미 조선어로 창작된 재즈가 음반화되었을 정도’란 말이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흔적은 어디 있을까. 최근의 흔적부터 뒤져보자. 

 

2004년 인디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곡 ‘김포 쌍나팔’에 샘플링 되기도 했고 1999년 영화 <해피 엔드> 사운드트랙에 통째로 실려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청춘계급’이 있다. 

 

들어보면, ‘새삼스럽게 웬일일까’ 하는 의문에 앞서, 그 시절 이미 스윙 재즈를 소화한 ‘조선 자스’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기 바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블루 노트를 쓴 ‘다방의 푸른 꿈’(이난영 노래)이나 만요(漫謠)와 재즈 스타일이 만나는 ‘엉터리 대학생’(김장미 노래)은 ‘청춘계급’의 스윙이 우연이 아니란 점을 ‘귀’로 확인해 준다.


앞서 언급한 곡들은 모두 1938~39년께 발표된 창작곡으로 ‘조선 자스’의 여러 층위를 보여준다. 동일한 작곡가의 작품이란 공통점도 있다.

 

누굴까. 당시 “짜스의 귀재(鬼才)” “음악에는 만능선수”란 평을 받았지만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 김해송이다. 남쪽에서 그의 이름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의 ‘남편’으로 호명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1950~60년대 국제적으로 활약한 김 시스터즈의 ‘부친’으로 일부 거론되기도 했다. 그나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들머리에 쓰여 화제가 된 ‘오빠는 풍각쟁이’(김해송 작곡, 박향림 노래)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실제 김해송은 누구의 남편이나 부친, 코믹한 노래의 작곡자 그 이상이었다.


김해송은 1930~40년대 조선 대중음악계에서 천재적인 존재였다는 게 당대를 경험한 이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1911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김해송은 1935년 오케(OKEH) 레코드의 연주단에 들어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1936년부터 작·편곡가, 가수, 하와이안 기타 연주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연락선은 떠난다’ ‘울어라 은방울’ ‘역마차’(이상 장세정 노래) ‘울어라 문풍지’(이난영 노래) ‘선창’(고운봉 노래) ‘화류춘몽’(이화자 노래) 등을 히트시켜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고(작곡자로는 본명인 김송규를 더 많이 썼다), ‘개고기 주사’ ‘모던 기생 점고’ 등을 불러 가수로서도 인기를 구가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김해송의 레코딩은 작곡가, 가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긴 하지만 한계 역시 뚜렷하다. ‘무대가 본령’이었던 그의 진면목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고의 흥행단체였던 오케 그랜드 쇼단과 조선악극단에서 그는 지휘자, 편곡가, 가수, 연주자로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1946년에는 백은선(무용가), 김정환(무대미술가, ‘김정항’이라는 이견도 있다)과 함께 KPK 악단(혹은 쇼단)을 설립해, 이난영, 장세정, 윤부길(가수 윤항기의 부친) 등 ‘올스타급’ 라인업과 함께 미군 구락부와 극장 쇼를 주름잡았다. 

 

그는 민요, 라틴 음악, 트로트, 클래식, 1920~30년대 시카고 재즈 및 스윙 재즈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악 편곡과 연출로 일제시대 일본인과 해방 이후 미군들에까지 극찬 받았다.
 
특히 김해송은 KPK에서 오페라 ‘투란도트’, ‘카르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원용해 뮤지컬을 실험한 무대 예술의 전위였다. ‘뮤지컬의 선구자’라는 평은 비단 어느 가요 평론가의 사견에 머물지 않는다. 

 

김해송이 해방 후 대중음악협회의 창단총회에서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점은 당시 그의 위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미군 공연에 적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납북’된 뒤 곧 생을 마감하였고(사망 과정에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을 작사한 조명암, 박영호가 월북했고 그 역시 월북했다는 혐의로 남쪽에서 그의 작품 상당수가 금지되거나 다른 이의 이름을 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김해송이란 이름이 낯선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은 한 음악인의 목숨과 작품에만 영향을 끼친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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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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