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팝의 사건사고 - 1. 해방공간 '아메리카'의 얼굴
① 미군이 안겨준 ‘선샤인’과 ‘슈샤인’
‘해방 60년’이니 한국 대중음악도 ‘독립 60년’이 된 것일까. 1945년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이르는 시공간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의 통념대로 ‘패배적이고 자학적인’ 유행가, 즉 트로트가 이 당시를 지배했을까. 이후의 신산스러운 역사를 보았을 때 그랬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해방은 ‘귀향’의 시기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들 가운데 대중예술인도 많았다. 귀향 뒤 이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었지만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현인(玄仁)일 것이다.
그에게는 ‘상하이에서 귀국한’이라는 경력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그의 경력을 더 뒤져 보면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 수학(1942)’, ‘중국 도시들의 악극단과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부르다, 상하이에 정착(1943)’, ‘일본군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귀향 중 베이징의 형무소 수감’(1945) 등이 남아 있다.
현인이라는 ‘중국인’같은 예명은, 한국인 본명인 현동주(玄東柱)라는 이름과 일본에 있을 때 창씨개명한 고토징(後藤仁) (혹자에 의하면 고토 히로시(後藤弘))이라는 이름이 뒤섞이고 변형되어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그가 풍운아처럼 아시아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는 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현인은 1947~8년께 무대에서 ‘신라의 달밤’을 부르고, 1949년에는 작곡가 박시춘에 의해 음반 취입이 이루어지면서 대중가요계의 슈퍼스타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그는 대중가요를 부르기 전 외국곡들을 번안해서 부른 주역으로 더 유명했다.
그 가운데 한 곡이 멕시코 노래인 ‘베사메 무초’였고 이 낯선 외래의 선율은 익숙한 한국어 가사와 만나 대중의 귀를 파고 들었다. “베사메 무초야 리라 꽃같이 귀여운 아가씨 / 베사메 무초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 마리아”라는 노랫말을 지금 들으면 어이 없기는 하다.
‘키스 미 머치’라는 뜻의 스페인어 ‘베사메 무초’가 여인의 이름으로 둔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도 현인에 대해 “월드 뮤직을 최초로 이 땅에 수혈했던 국민가수”라는 생뚱맞은 평이 나오고 있으니, 세상이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는 ‘월드 뮤직’은 고사하고 ‘팝 뮤직’이라는 말도 없을 때였다. ‘재즈’나 ‘양곡(洋曲)’이라는 용어만 있을 때였다. 이런 재즈, 당시 말로 ‘쟈스(ジャ-ス)’의 기원은 1920년대 후반의 경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대 ‘총력전 체제’가 성립되면서 일제가 재즈를 ‘적성국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금지시킨 일이 있지만, 1945년 이후 재즈는 전세계를 주름잡게 된 미군의 존재와 직결되어 한반도 여기저기의 ‘미군 구락부(club)’에서 흘러나왔다. 현인, 박단마, 박혜옥, 이인숙 등이 당시의 ‘재즈 가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베사메 무초’가 재즈인가. 아, ‘쟈스’는 ‘재즈(jazz)’가 아니라, 외래 대중음악을 총칭하는 범주였다. 그러니 샹송, 탱고, 칸쏘네, 맘보처럼 미국의 대중음악과 거리가 있는 음악들도 모두 ‘쟈스’에 포함되었다.
샹송인 ‘고엽’이 ‘베사메 무초’와 더불어 현인의 또 하나의 히트곡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용어의 교통정리가 되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재즈 가수들이 히트시킨 ‘재즈곡’에는 위 두 곡과 더불어 ‘유 아 마이 선샤인’이 언급된다. 선샤인. 아마도 미군이 가지고 온 추잉껌, 초콜릿, 씨레이션 등이 ‘선샤인’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였기 때문에 이 곡이 더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짝반짝 빛나야 할 것은 ‘당신(You)’만이 아니었다. 몇 년 뒤의 일이지만 박단마가 불러 히트시킨 ‘슈샤인 보이’(이서구 작사, 손목인 작곡)라는 노래를 들으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해방’이 무색해지는 과정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서는 ‘도쿄 슈샤인 보이’나 ‘긴자 캉캉 무스메(긴자의 캉캉 걸)’라는 노래가 히트를 기록했으니 ‘미군의 점령’이라는 동아시아의 현실은 무척이나 혼동스럽고 모순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 가지 더. 몇 년 전 영화 ‘신라의 달밤’이 히트했을 무렵 평양발 통신이 하나 내려 왔다. 내용인즉슨 ‘신라의 달밤’은 해방 이전부터 존재했던 곡이고, 원제는 ‘인도의 달밤’이라는 것이다.
노랫말이 엉뚱하게 바뀐 것은 작사가 조령출(조명암)이 월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한겨레>, 2001년 7월19일치). 물론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고, 북한은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하지만 1940년대를 보내면서 ‘신라의 달밤’의 원작자와 연관된 ‘북한’라는 기호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금기의 대상이 됐다. 현인의 경력에 등장하는 ‘도쿄(일본)’와 ‘상하이(중국)’도 마찬가지로 기억에서 점차 삭제되어 갔다.
대한민국, 즉 남한에서는 날이 갈수록 미군이라는 물리적 권력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라는 상징적 권력이 더욱 강해져 갔다. 이 권력의 작용은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이었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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