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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10 한국팝의 사건사고 - 3. 한국전쟁과 대중음악의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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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3. 한국전쟁과 대중음악의 ‘분단’

 

③ 미아리와 테네시

한국전쟁이 대중음악, 나아가 대중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일까. 분명한 것은 전쟁이 휩쓸고 가면서 한반도는 서로를 ‘괴뢰’라고 생각하는 반쪽짜리 국민국가로 분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 개인으로서는 ‘도 아니면 모’ 식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인한 상황을 낳았다. 즉, ‘반공 아니면 반제’였고, 중간은 없었다. 따라서 대중음악도 분단되었다.

이는 대중음악인 개개인이 ‘조선(북한)’과 ‘대한(남한)’을 선택했다는 차원을 넘어, 작품 속에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중음악의 가사에는 다시 얼굴을 보지 않을 사람들이나 사용할 적대적 어휘와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우 사정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지만, 남한의 경우는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두 인물을 꼽으라면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이다. 

 

논란은 있겠지만 서민의 애환을 잘 그려낸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 평가되는 대중문화계의 거인들이고, 이들은 이미 해방 공간에서 ‘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을 합작했다. 

 

박시춘이 작가로 활동했던 럭키 레코드에 유호가 한때 문예부장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각별한 연을 상징해 준다. 

 

이 두 명이 1950년 가을 서울이 ‘수복’되어 재회한 자리에서 만들어낸 곡은 ‘진중가요’인 ‘전우야 잘 자라’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로 시작하여 ‘낙동강’, ‘추풍령’, ‘한강수’, ‘삼팔선’이 차례로 등장하는 이 곡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두 인물은 그 외에도 전쟁을 소재로 한 곡들을 남겼다. ‘1·4 후퇴’를 배경으로 한 ‘전선야곡’(발매는 1952년 5월께), 서울 환도를 배경으로 한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년 8월께)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의 주요 고비 때마다 대중가요는 전쟁에, 즉 정치에 깊게 연관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박시춘은 해방공간에서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남인수 노래), 전쟁 막바지에는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현인 노래)를 작곡했고, 유호는 ‘대한민국 군가 넘버 원’이라고 부를 만한 ‘진짜 사나이’를 작사했다.

이런 경향이 두 인물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기 그리고 그 직후 제작된 음반들에서 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한 곡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꿈에 본 내 고향’(박두환 작사/김기태 작곡/한정무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반야월/이재호/이해연 노래), ‘판문점의 달밤’(유노완 작사/이봉룡 작곡/고대원 노래), ‘삼팔선의 봄’(김석민 작사/박춘석 작곡/김석민 노래) 등등…. 전쟁과 분단은 ‘한국 대중가요의 주조(主調)는 비탄과 탄식’이라는 세간의 편견을 더욱 고착시켜 버렸다.

따라서 2년 전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전우야 잘자라’를 합창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는 보도를 보고 심난해 할 필요는 없다. 

 

자의든 타의든 ‘자유대한’을 선택한 그 세대의 정체성에서 이런 가요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유행에 대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점도 있다. 

 

다름 아니라 전쟁으로 생사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비장하거나 구슬픈 분위기의 노래들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페르샤 왕자’, ‘홍콩 아가씨’ 같은 이국적 분위기의 곡들이 거의 동시에 히트했다는 점이다. 

 

이 곡들의 작사가인 손로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해야겠지만, ‘샌프란시스코’와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이 박시춘의 작곡이라는 사실은 지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런 이국 취향의 곡들에 대해 ‘무의식적 욕망마저 서양화(미국화)되어 버렸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통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단정적인 평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형성된 정신적 구조를 단순화시켜 버린다. 전쟁 상황에서 서양, 특히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기저에는 무정형의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는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가장 인기 있었던 미국의 팝 가수는 누구였을까. 한 명만 뽑으라면 단연 패티 페이지(Patty Page)일 것이다. 

 

‘테네시 왈츠’, ‘체인징 파트너스’,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 등 그 우아한 3박자 리듬의 곡들이다. 2박자 트로트 리듬의 애달픈 가요와 3박자 왈츠 리듬의 우아한 팝송 사이의 거리는 ‘미아리’와 ‘테네시’의 거리와 비슷했다. 때로 아주 멀면 그게 더 큰 동경을 낳는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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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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