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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13 한국팝의 사건사고 - 9. 타이 군인과 한국 소녀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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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9. 타이 군인과 한국 소녀의 로맨스?


⑨전쟁을 매개로 한 한류의 전사?

 

1950년대까지를 마무리지을 시점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최근에 방콕에 갔다가 발굴(?)한 희한한 음반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타이의 ‘흘러간 가요’를 재발매한 시디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에서 발견한 음반인데, 타이 군복을 입은 군인과 일본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포옹을 하는 표지 그림이 눈길을 잡았다.

 

나중에 타이의 지인에게 물어 보니 음반 제목은 ‘Ari-dang’이며, ‘original Korean and Japanese music’이라는 뜻의 부제와 ‘Sad Voices from Korea'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두 번째 트랙에서 난데없이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이 흘러나왔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로 알려진 그 노래다. 1절은 한국어 가사 그대로였고, 2절과 3절은 타이어로 번안한 가사였다. 

 

다른 트랙들은 한국 가요도 있었고, 일본 가요고쿠(歌謠曲)도 있었다. 한국 가요가 타이까지 전파된 것이 놀라왔지만, 타이인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구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도 신기했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의 작사가 손로원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이국적 분위기의 작사를 도맡다시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샌프란시스코’, ‘인도의 향불’, ‘홍콩 아가씨’, ‘페르샤 왕자’, ‘사하라 사막’, ‘런던 소야곡’, ‘바다비아의 밤’, ‘밤 깊은 차이나타운’, ‘이별의 월남선’, ‘카이로 시장’, ‘내가 울던 빠리’, ‘모로코 사랑’, ‘베니스의 창문’, ‘워싱턴 블루스’, ‘정거장 에키타스리’, ‘차이나 워리 꾸냥’ 등등(작곡자와 가수는 생략한다).

 

이 가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국적불명’이라는 우호적이지 않은 평이 따라 다녔다. 그런데 달리 보면 북새통 같았던 시대에 저렇게 과감한 상상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이를 그저 작사가 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해석하면 그만일까. 그보다는 한국전쟁기 ‘다국적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이국(異國)의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한국인의 상상에 들어온 징후라고 평하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저 노래들이 그저 소수만 듣고 흘러간 것이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면 말이다. 1940년대 중반까지 ‘대동아전쟁’을 거치며 한국인들이 아시아 각지에 흩어지면서 이국의 문화를 경험했다면,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온 이국의 군인들을 통해 외국의 다양한 문화들이 수입된 셈이다.

 

역의 흐름도 있었다. 타이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을 통해 한국의 노래들이 다수 전파되었고, 특히 지금도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아리랑’을 대부분 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전쟁에 참전한 타이 군인이 한국에서 만난 한 소녀와의 슬픈 로맨스에 대한 일화도 타이의 일반 민중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소의 왜곡이 있지만 저 이상한 음반 표지에 대한 설명은 대충 될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1950년대의 ‘한류(!)’는 전쟁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작금의 한류는 무엇을 매개로 한 것일까. 자본? 기술? 이수만이라면 ‘문화 컨텐츠’라고 답하겠지만 ‘글쎄올시다’이고, 대답은 나중에 하자. 궁금하면 비가 타이의 여가수 타나파(Thanapa)와 함께 부른 “I Do”를 들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전쟁은 이런 아시아 나라들 사이의 역내 문화교류마저 당분간 소강상태에 처하게 했다. ‘냉전’이라는 이름의 전쟁이다.

 

냉전의 효과는 단지 민족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한미동맹’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또 하나의 부수효과를 가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1960년대 이후 이국적 상상이 점차 소멸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인은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국가’를 부르면서 ‘국민의례’를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보’를 자랑스러워 하고, ‘국가대표’ 팀을 응원하고, ‘국경일’의 행사에 동원되어야 하고…. 한 마디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까지의 연재를 통해 당시의 음악문화가 ‘한많은 애가(哀歌)’ 일색이 아니었고, 다양하고 풍부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것이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과 격동’을 겪는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놀 때는 놀아야’ 하는 법이고, 노는 것 가운데 음악처럼 중요한 것은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건 1960년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단,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방송에서는 민간방송이 속속 설립되고 텔레비전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유성기는 ‘전축’으로, SP는 LP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5·16 혁명’에 이은 ‘조국 근대화’가 추진되던 분주하고 어수선한 시기의 일들이다. 그리고 어느 날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라는 곡이 흘러 나왔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는 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주 감각적인 곡이었다. 그 새로운 시대를 문화적으로 누가 소유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화적 세력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지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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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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