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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8. 미군클럽서 ‘훈련받은’ 대중음악

⑧미8군 쇼 무대 

 

1950년대 이 땅에는 대중음악 ‘별세계’가 존재했다. 다름 아니라, 흔히 ‘미8군 무대’라고 부르는 세계다.

 

1960~70년대에 별처럼 빛나는 활약을 보인 대중음악인들을 얘기할 때 전설처럼 언급되는 바로 그 무대 말이다. 미8군 무대란 말이 금시초문인 이들에겐 ‘주한미군 및 군무원을 대상으로 한국 연예인들이 벌인 쇼 무대’라는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미8군 무대의 효시는 1945년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이 주둔한 곳에 째즈 밴드가 동원되어 원시적인 외화획득의 효시가 되었다”는 평론가 황문평의 회고를 보면 이렇게 나와있다.

 

“해방되던 해 반도호텔에서 지까따비(주: 일본 버선 모양의 노동자용 작업화)에 모닝코트를 입고 미 항공단 환영 연주를 했던 김호길은 한국전쟁 후에는 대구에 머물면서 미군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동촌 비행장에 나가 연주를 했다”(<동아일보>, 1973년 4월 5일치)는 기사는 참고할 만하다. 한국전쟁 직후까지는 미군 무대가 그다지 체계적이지 못했음도 엿볼 수 있다.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 중반 이후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휴전 이후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게 된 일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에 있던 미8군 사령부가 1955년 서울로 이전한 사실은 시사적이다. 주한미군의 규모가 커지자 이들에 대한 공연 수요도 늘어났다. 직접 미군위문협회(USO) 공연단이 방문해 위문공연을 벌이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공연단에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등 희대의 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일상적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일상적이고 체계적인 미군 위문공연을 위해선 한국 연예인이 편재(遍在)하는 방법 외엔 없었다.

 

1957년경 미8군 쇼 무대에 한국 연예인을 송출하는 용역업체들이 앞다투어 등장했다. 이전 시기에는 연주자 개인이나 팀이 개별적으로 클럽과 교섭하여 쇼를 벌였다면, 이제 공급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때 생긴 화양, 유니버설, 삼진, 공영 등의 용역업체들은 산하에 쇼 단체들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는 미군 당국이 쇼에 대한 심사(일명 ‘오디션’)에 엄격했기 때문이다.

 

각 쇼단은 보통 6개월마다,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음악전문가들이 심사하는 엄준한 오디션 절차를 거쳐 더블 A, 싱글 A 하는 식으로 등급이 매겨졌는데, 기득권이나 명성은 전혀 통하지 않아 탈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오디션에서 좋은 등급을 받으면 자축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하니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8군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왕도는 없었다. 최신 레퍼토리를 입수해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실력과 흥행성을 배가하는 길이 유일했다.

 

악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미군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고 최신 음반을 입수해 일일이 채보하면서 소속 용역회사 창고에서 지지리 연습했다는 얘기는 미8군 무대 출신 음악인들의 공통된 후일담이다.

 

당시 실제 미8군 쇼는 어떤 것이었을까. 빅 밴드 편성의 악단은 재즈를 위주로 컨트리, 리듬앤블루스, 로큰롤 등 다기한 스타일을 연주했다.

 

쇼는 음악이 중심이긴 하지만 무용,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된 1시간 남짓의 버라이어티 쇼에 가까웠다. 그래서 쇼 단체는 악단 외에, 가수, 무용수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러 재능을 가진 멀티 플레이어도 적지 않았다.

 

베니 쇼, 에이 원 쇼,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 토미 아리오 쇼, 웨스턴 주빌리 쇼 등은 당대 미군 클럽들을 누비던 대표적인 쇼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무대가 한창 정점에 이르렀을 때 미군 클럽은 264곳에 이르렀고 미군 쇼를 통해 한국 연예인들이 수익은 연간 120만 달러에 육박했다는 증언이 있다. 정확한 수치인지는 ‘복기’할 필요가 있지만, 당시 경제나 무역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질문. 미8군 무대는 한국 대중음악 씬(scene)에 포함할 수 있을까. 미군 클럽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한국인이 아니라 미군 청중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의 주체가 한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포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난 시절, 구미(歐美)화된 음악을 지향하던 음악인들에게 미8군 무대란 별세계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국 현대사가 그렇듯, 20세기 후반 한국 대중음악 역시 한편으로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이식적으로, 창작보다는 모방의 과정을 통해 첫 발걸음을 뗀 셈이다.

 

미8군 쇼 무대에서 단련한 음악인들은 1960년대부터 한국인 대중을 상대로 한 이른바 ‘일반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한국 대중음악이 미국화의 가속 페달을 힘껏 밟기 시작했다는 점은 통설이다. 그 과정에서 ‘젊은 피’로 수혈된 미8군 출신 음악인을 일일이 열거하면 이 지면을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그러니 턱없는 일이지만 이봉조, 김대환, 김희갑, 신중현, 김홍탁 등의 연주자(및 작편곡가), 한명숙, 최희준, 현미, 패티 김, 윤복희, 펄 시스터즈 등의 가수 이름을 기억하는 선에서 갈음하고, 1960년대의 문턱을 넘어보자, 폴짝.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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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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