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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10 한국팝의 사건사고 - 4. 댄스홀 열풍과 김광수·엄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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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4. 댄스홀 열풍과 김광수·엄토미

 

④쉘 위 댄스?: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

때는 1937년 벽두. 잡지 <삼천리>에는 총독부 경무국장을 수신자로 한 공개 청원의 글이 실렸다. 레코드사 문예부장, 배우, 다방 마담, 기생 등 당대의 ‘모던 남녀’들이 연명한 내용을 요약하면,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는 것. 

 

당연지사 일축된 이 일은 식민통치와 ‘총력전 체제’가 심화하던 시기에 일어난 ‘언감생심’ 해프닝으로 보일지 몰라도, ‘구미(歐美)식 가무(歌舞) 공간’에 대한 욕망이 일찍이, 그리고 자연스레 발현되었음을 알린 ‘사건’이었다.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 ‘피폐하고 겨를 없던 복구의 시기’에도 일어났다. 이번에는 탄원성 글 대신 두 가지 사건이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나는 1954년 한 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사교 댄스와 성 윤리에 대해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이 소설은 인텔리의 사회 풍조 개탄이나 이중성과는 별도로 단행본 출간과 영화화로 이어지며 쾌조의 흥행을 구가했다. 

 

다른 하나는 1955년 여러 지면을 뒤흔든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해군 장교를 사칭해 70여 여성들을 농락한 사건의 주인공은 ‘춤만 추고 나면 거의 다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는 증언과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희세의 무죄 판결을 두고두고 회자시켰다.

이 두 사건은 선정주의적 보도와 논란, 성 윤리의 아노미 현상을 제거하면 사교댄스와 댄스홀 열풍을 배경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남선녀와 음악과 춤이 삼위일체로 만나니 ‘남녀상열지사’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었을 터.

 

하지만 문화면을 넘어 사회면을 강타한 당시의 센세이션이 ‘근엄한 척하기 일등’인 신문과 식자층에 의해 증폭되었음을 지적하는 건 중언부언에 가까울 것이다. 요즘도 심심찮게 보이는 ‘후려치면서 팔아먹는’ 수법에 기반했다는 점도 마찬가지.

그런데 1950년대 춤바람과 댄스홀 붐이 대체 어때했기에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걸까. 색안경을 벗고 보면, 대단했다는 게 공통된 증언이다. 

 

해방 직후, 미쓰코시백화점(이후 동화백화점, 현재 신세계백화점)과 조지야백화점(이후 미도파백화점,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 대규모 고급 댄스홀이 개장했다. 

 

1950년대에 들어 곳곳에 댄스홀이 우후죽순 들어서며 ‘댄스홀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 과장을 보태자면, ‘무허가 교습소’에서 트레이닝을 마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셈.

그렇다면 1950년대 댄스홀을 뜨겁게 달군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신나면서도 격조 있는 음악, 즉 재즈, 스탠더드 팝, 라틴 음악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이국적 가사와 정서가 등장하는 가요와 함께 탱고, 맘보, 차차차 등 라틴 ‘팝송’이 유행하던 현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때의 주역으로는 김광수와 엄토미의 존재를 우선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수라면 ‘불세출의 가수’ 배호의 외삼촌,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 말기 일본에서 사쿠라이 기요시 탱고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김광수는 1940년대 후반부터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고 이후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방송국 악단장을 역임하며 경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최고로 평가받던 김광수 악단을 거친 이들로는 연주자 노갑동, 최상룡, 김인배, 이봉조 등과 가수 현미, 이금희, 배호 등이 있다.

색소폰 및 클라리넷 연주자인 엄토미(본명 엄재욱)도 1940년대 말 이후 연주자와 악단 리더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김광수와 마찬가지로 작곡, 영화음악, 방송국 악단 등에 두루 솜씨를 발휘한 엄토미는 부산 피난 시절 김광수, 박춘석(피아노)과 함께 ‘올스타 쇼’ 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광수 악단이 라틴 음악의 선두주자였다면, 엄토미 악단은 재즈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다.

 

엄토미가 영화배우 엄앵란의 숙부란 사실은 연예정보 이상은 아닐 테지만, 그가 은성살롱에서 무명 시절의 신중현을 종종 무대에 올렸다는 점은 신중현 바이오그래피의 한 대목 이상이다(김광수도 이 ‘당돌한 10대’를 무대에 데뷔시켜준 일화가 있다).

 

‘한국 록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당시 하늘 같은 분이었다’는 말로 엄토미와 김광수를 회고하는 것도 가십 이상이다.

마라카스를 들고 악단을 지휘하던 김광수의 모습이나 잘 생긴 외모에 색소폰을 연주하며 악단을 리드하던 엄토미의 모습, 그리고 이 같은 전속 악단의 반주에 맞춰 양복을 말쑥하게 입은 남성과 한복과 고무신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여성이 짝을 이루는 광경은 당시 댄스홀 붐에 관한 스냅 사진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방송으로도 이어진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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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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