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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21 한국팝의 사건사고 - 17. 솔·포크의 상륙, 번안곡이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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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17. 솔·포크의 상륙, 번안곡이면 어떠랴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 (17) 펄 시스터스와 트윈 폴리오: 소울과 포크의 수입대체

 

1969년. 한때 팝 음악의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해’라고 기억할 것이다. 그 알딸딸하고 몽롱한 잔치 분위기가 몇 달 뒤 ‘알타몬트의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도 기억한다면, ‘전문가’ 행세를 해도 좋으리라.

 

일요일 오후쯤 ‘와이들 씽’이나 ‘댄스 투 더 뮤직’을 틀어놓고 자기가 마치 1969년에 뉴욕 주 어떤 농장에 가 본 것 같은 망상에 젖는 ‘마니아’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하여) 이렇게 전문가이거나 마니아인 척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1970년대의 <월간 팝송> 같은 음악잡지를 읽으면서 ‘복습’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1969년을 상징하는 불멸의 아티스트들, 예를 들어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 같은 불멸의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1969년 한국에서 인기를 누렸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소수의 예민한 한국의 음악인들은 즉각적으로 이에 반응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몇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한국에서 ‘팝송’은 무풍지대였는가. 천만의 말씀. 명동과 종로 등지의 음악감상실과 생음악 살롱에서는 팝송에 중독된 젊은이들이 득시글했다는 것이 당시를 살아간 이들의 증언이다.

 

그런데 어떤 팝송? 다양했겠지만 1960년대까지 가장 인기 있었던 음악은 역시나 ‘비틀스(The Beatles)’ 같은 영국 젊은애들로 이뤄진 그룹의 음악이었지만, ‘솔’과 ‘포크’의 위세도 그에 못지 않았다.

 

솔과 포크가 무슨 음악인지, 한국에서는 어떤 곡이 인기를 누렸는지, 누가 이런 음악을 보급했는지 등의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을 테니 생략하고, 몇 달 전 나온 좋은 책 한 권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아마 제목이 <한국 팝의 고고학 1960>일 것이다. 단, 표지를 보고 미리 실망하지는 말기를 당부한다.

 

1960년대가 지나기 전 나온 묘한 음반 하나는 솔과 포크가 한국에서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음반은 기본적으로 ‘펄 시스터스’와 ‘트윈 폴리오’의 합동 음반이고 ‘김인배 편곡집’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거두절미해서 말한다면 여성 듀엣 ‘펄 시스터스’와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는 당시 ‘남고생의 취향’과 ‘여고생의 취향’을 각각 대변한 존재들이다.

 

10대 남자가 미니 스커트를 입은 늘씬한 몸매의 ‘펄 시스터스’를 보았을 때, 10대 여자가 청바지를 입은 해사한 용모의 ‘트윈 폴리오’를 보았을 때의 그 생생한 느낌은 나의 문장력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대부분 번안곡들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뿌리가 ‘가요’가 아니라 ‘팝송’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슈프림스(The Supremes)’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을 수입대체한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수입대체가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랴. 그렇지만 두 듀엣에는 ‘기성’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고, 그것으로 필요충분한 것이었다. 경음악 악단장 김인배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당시 음반업계의 관행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베테랑 음악인이 젊은 음악인을 후견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용어로 ‘솔 싱어’와 ‘포크 싱어’가 합동으로 음반을 발표하는 일은 본토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렇다고 당시의 미국과 한국이 얼마나 달랐는지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불필요하다.

 

당시 ‘팝’을 하려고 했던 음악인들 사이에서 장르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이 음반은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두 듀엣을 대표하는 음반은 아니다. ‘트윈 폴리오’는 이듬해인 1970년에 발표한 독집 음반이 두고 두고 쏠쏠하게 팔렸고, ‘펄 시스터스’는 이 음반 이전에 발표한 음반이 이미 대박을 친 상태였다. ‘트윈 폴리오’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할 기회가 있을 테니 ‘펄 시스터스’에 집중하면서 마무리하자.

 

이제까지 열심히 떠든 위 음반에는 ‘펄 시스터스’의 이름을 따라 다니는 두 개의 히트곡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는 ‘커피 한 잔’이고 다른 하나는 ‘님아’다. 이 곡들은 ‘펄 시스터스’도 ‘펄 시스터스’지만, 신중현이라는 이름과도 긴밀하다.

 

이쯤 되면 눈치챘을 텐데, 한국에서 ‘솔’을 보급한 것은 실질적으로 ‘작곡가 신중현’의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1969년 말 ‘엠비시(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펄 시스터스’가 ‘영예의 가수왕’상을 차지한 사건을 우드스탁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더라도 팝 혁명의 한국형 버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뻥’일까. 신중현이라는 인물이 했던 일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뻥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뻥도 아닌 사건들이 드러날 것이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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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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