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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14. 40년전 청년들 ‘꽈배기 춤’ 에 미쳤다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 ⑭트위스트: 로큰롤 댄스 열풍

 

20세기 로큰롤의 ‘결정적 장면’을 말할 때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와 1964년 비틀즈가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장면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는 사실은 2주 전에 얘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에 로큰롤 댄스 열풍을 낳은 ‘1956년 엘비스’와 ‘1964년 비틀즈’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트위스트가 있었다.

 

트위스트의 서막은 처비 체커가 열었다. 1960년과 이듬해에 두 번이나 차트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운 ‘더 트위스트’, 역시 1961년 탑 10 히트곡이 된 ‘레츠 트위스트 어게인’은 단지 처비 체커를 스타로 만드는 데 머물지 않았다.

 

리듬앤블루스의 12마디 형식을 변용한 트위스트 음악의 빠른 리듬에 맞춰 청년들이 댄스플로어에서 춤추며 광란의 시간을 보내는 현상을 세계적으로 퍼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땠을까?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처비 체커의 곡들과 벤처스의 ‘상하이드 트위스트’, ‘기타 트위스트’ 등이 크게 유행했다.

 

또 이런 음악에 맞춰 일명 ‘꽈배기 춤’이라 불리기도 한 ‘바닥에 발 비비며 몸을 뒤틀고 흔드는 트위스트 춤’을 추는 것은 청년들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도 ‘교실 밖’ 필수 코스였다.

 

당시 청년들의 주요 문화공간이었던 음악 감상실에서는 정기적으로 트위스트 춤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요즘 나이트 클럽에서 댄스 경연대회를 여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 감상’의 공간에서 춤 경연대회가 열린 이유는 지금처럼 마땅히 춤추며 즐길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트위스트 김이란 예명을 가진 가수 겸 배우가 등장한 사실은 당시 트위스트가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재미있는 예다.

 

1950년대 후반 맘보가 그랬던 것처럼, 트위스트는 1960년대 ‘가요계’의 트렌드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 시스터즈의 ‘울릉도 트위스트’,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상 황우루 작사·작곡)은 ‘트위스트 가요’로 큰 인기를 누렸다.

 

맘보가 성인 사교댄스의 사운드트랙이었던 반면 트위스트는 청년 댄스 사운드트랙이었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청춘은 트위스트’, ‘아리랑 트위스트’, ‘둘이서 트위스트’ 등 제목에 트위스트란 용어를 쓴 노래들이 우후죽순 등장한 점은 맘보 유행과 공통적이다.

 

한국에서 트위스트는 비단 1960년대 초·중반에만 유행한 것은 아니다. 물론 트렌드는 1960년대 말 솔(soul)로, 1970년대 고고(gogo)로 옮겨갔지만, 트위스트는 적어도 1960년대 내내 그리고 부분적으로 1970년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19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고고 세대’에게 물어보면 야전()을 들고 야외에서 춤추던 레퍼토리 중 트위스트가 빠지지 않았다는 추억 어린 후일담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1958년 생 트로트 가수의 한 노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트로트 사대천왕’ 중 하나로 롱런하고 있는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이수진 작사, 설운도 작곡, 1997) 말이다.

 

“학창시절에 함께 추었던 잊지 못할 상하이 트위스트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추억 속의 사랑의 트위스트”로 시작되는 그 곡은 1960년대 이후에도 트위스트가 학창시절의 사운드트랙으로 인상 깊게 남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랑의 트위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터보의 ‘트위스트 킹’과 디제이디오시의 ‘울릉도 트위스트’ 커버 버전이 발표된 현상을 트위스트 리바이벌이라고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1997년께 트위스트를 다시 떠올리거나 새롭게 귀동냥할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960년대 트위스트 붐에서 가요화뿐 아니라 연주의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트위스트를 처음 수용한 미8군 쇼 무대와 그곳 출신 음악인들의 연주 말이다.

 

1960년에 접어들면서 10인조 이상의 빅 밴드보다는 4~7인조 가량의 소편성 악단이 미8군 무대의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편성의 변화는 밴드에서 단지 하나의 악기에 불과하던 기타를 상대적으로 비중 있는 악기로 부각시켰다.

 

신중현이 ‘히키 신’이란 미8군 무대의 예명으로 발표한 음반에 실린 ‘히키 신 키타 투위스트’란 연주곡은 단지 트위스트의 유행뿐 아니라 이후 한국의 록 음악사와 관련해서도 시사적인 것이었다. 전기 기타의 시대, 이를 앞세운 한국의 로큰롤을 예시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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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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