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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21. 겁없이 통기타 맨 ‘낭만’ 대학생의 반란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21) 포크송, 대학생의 낭만으로부터 창작의 자의식으로

 

올 가을 젊은애들이 몰려다니는 페스티벌들이 많다. 그런데 1970년 가을,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확히 ‘4반세기 전’에도 페스티벌이 유난히 많이 열렸다.

 

지난 번에 언급한 ‘전국 보컬 그룹(그룹 사운드) 경연대회’(1969년부터 1971년까지) 이외에도 크고 작은 ‘잔치’가 많이 열렸다. 기록을 뒤져보니 1970년 9월 4일부터 4일 동안 서울 시민회관에서 ‘후트네니 고고고’라는 이름의 대형 공연이 있었는데, 당시 용어로 말하면 팝 계열의 음악인이 총망라된 무대였다.

 


(» 1971년 8월 개최된 청평 페스티벌에서 ‘포크 싱거’ 김민기가 노래하는 모습. 마이크를 들고 있는 이는 양희은과 윤형주(왼쪽), 그리고 이백천 PD(오른쪽)이며, 뒤에서 기타 반주를 도와주는 이는 ‘솔 싱거’ 이용복이다 )


이런 대형 공연 외에 아기자기한 공연도 많이 있었다. 9월2일에는 YMCA 강당에서 ‘Y 포크 페스티벌’이라는 행사가, 그리고 11월 20일에는 YWCA 강당에서 ‘청개구리 사운드’ 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런 잔치 분위기는 이듬해 여름에 절정을 이루어서 이제는 ‘도심의 실내’가 아닌 ‘교외의 야외’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971년 8월 17일부터 6일 동안 청평에서 ‘한국판 우드스톡’이라고 부를 만한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1970년부터 ‘팝 싱거’나 ‘보컬 그룹(그룹 사운드)’ 이외에 ‘포크 싱거’라고 불리던 존재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당시의 포크에 대해 ‘그게 무슨 포크냐?’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1970~71년에 ‘포크’라고 불렸던 음악은 ‘팝’의 하나의 계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창작곡보다는 번안곡의 비중이 높았고, 번안곡도 ‘포크’라는 범주와는 거리가 있었고, 그 미학적 코드도 자기성찰과 사회비판이라기보다는 순수, 매혹, 격조, 낭만 등이었다. 이게 ‘수입되고 번역된 한국 포크송’의 현실이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이 무렵 우후죽순처럼 결성되어 세상에 이름을 알린 포크 싱어들과 그들의 히트곡을 나열하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분위기 가운데 하나는 혼성 듀엣이 부르는 ‘연인들의 밀어’ 같은 곡들이다.

 

뚜아에무아(이필원, 박인희)의 ‘약속’, 라나에로스포(한민, 은희)의 ‘꽃반지 끼고’, 바블껌(이규대, 조연구)의 ‘짝사랑’ 등의 곡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현재 40대 중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풋풋하고 설레였던 ‘첫사랑의 추억’처럼 남아 있는 곡들일 것이다. 물론 당시 고등교육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한편 남성 듀엣(혹은 트리오)들의 등장도 두드러진다. 한국 포크의 효시라고 할 만한 ‘트윈 폴리오(윤형주, 송창식)’ 이외에 ‘투 코리언스(김도향, 손창철)’, ‘트리플(장계현, 김세환, 김운호)’, ‘쉐그린(이태원, 전언수)’, ‘투 에이스(오승근, 홍순백)’, 이장희와 강근식, ‘도비두(김민기, 김영세)’, ‘4월과5월(백순진, 이수만(!))’ 등이 당시의 주간지를 장식한 이름들이다.

 

스타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동아시아권에서 유난히 인기가 높았던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도 있겠고, ‘피보다 진한 우정’을 표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대학가’나 ‘살롱가’에서 아마추어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음반가’나 ‘방송가’에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을 뒤에서 후원해 주면서 방송국 스튜디오나 음반사 스튜디오까지 끌고 갔던 사람들이 있었던 셈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긴 생머리를 하고 청바지를 입은 여대생’이나 ‘허줄한 옷차림에 더벅머리를 한 남대생’이 대중매체를 통해 표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통기타’는 이들의 필수 휴대품목이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71년 말에 일어났다. 청평 페스티벌 등을 통해 ‘젊은이의 우상’으로 부상한 인물들이 일제히 음반을 발표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작자창(自作自唱)’이라는 대담한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한대수, 서유석, 이연실, 방의경, 김광희, 조동진, 이장희 등 이 시기에 자작자창을 시도한 인물들의 이름도 기억해 두어야 하겠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겁대가리 없던’ 인물은 김민기였다.

 

‘아침이슬’, ‘그날’ 등이 수록된 양희은의 데뷔 음반(1971.9)에서 작사, 작곡, 기타 연주를 맡더니,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이 창작한 곡들을 중심으로 데뷔 음반(1971.11)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음반에 대해서는 신화와 전설이 많으니 반복하지 말자. 그런데 신화와 전설은 더 있다. 김민기의 독집이 나오기 1년 전 쯤 발표된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1970.12)에는 ‘친구’를 비롯하여 도비두의 이름으로 노래 세 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얼마 뒤에 나온 양희은의 2집 음반(1972.5)의 뒷면에는 ‘도와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이수만(!)의 이름이 등장한다. 지난 여름 발표한 보아의 5집의 마지막 트랙이 ‘가을편지’(고은 작사, 김민기 작곡)였던 것이 아주 해괴한 일만은 아니었나보다.

 

당시 청년문화의 생기가 맺어준 오랜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잘못된 만남이 초래한 질긴 악연이라고 해야 할까? 질문은 계속 된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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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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