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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15. 트로트 대세 뚫고 싹튼 ‘변혁의 씨’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 ⑮1967년 한국, 청년문화의 어떤 전조(前兆)

 

‘팝 음악의 역사’같은 책을 보면 1967년을 ‘사랑의 여름’이라고 부른다. 이 해에 발표된 ‘록 음악의 명반’을 나열하면 이번 지면은 다 끝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그때의 알딸딸한 분위기는 아직 ‘해외토픽’일 뿐이었을 게다. 몇 년 뒤 청평과 남이섬에서 ‘페스티벌’이 열리긴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만 아껴 두자.

 

물론 당시 모든 첨단적인 것의 집결지였던 서울 명동에서는 이런 ‘자유의 바람’의 냄새를 맡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기는 했다.

 

그게 진정한 자유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제껴 두어야 할 정도로 이 냄새의 중독성은 매우 강했던 모양이다.

 

( 1967년 ‘유럽풍’이라는 찬사를 받은 노래 ‘안개’로 등장한 정훈희 ->) 

 

음악감상실이나 생음악살롱(주의! 룸 살롱과는 무관) 등이 속속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는 최신 유행을 따라잡으려는 언니, 오빠들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증언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기지촌 GI 문화’로 유입된 아메리카 문화는 이제 한국의 중간계급 청년과 만나서 ‘토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1960년대 가요’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1964년부터 거의 10년 동안 한국 대중가요는 이미자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967년 봄의 한 주간지 기사를 뒤져보면 “이미자는 국산 취입 디스크 판매율의 6할을 차지해왔다는 달러 박스. 디스크 상()에서 팔리는 10개 중 6개는 이미자의 것이었다는 통계다”라는 기사가 나오니 이미자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문주란, 은방울 자매, 남진, 나훈아, 배호 등 신인까지 등장하면서 ‘이 장르의 음악’은 한국 대중가요의 전형처럼 굳어져 갔다. ‘트로트’라고 불러도, ‘뽕짝’이라고 불러도 올바른 용어법은 아닐 테지만 좌우지간 이 음악은 널리 널리 오래 오래 장수했다.

 

그렇지만 한반도 남쪽의 보수적인 방송가라고 해도 ‘1960년대’라는 국제적 청년문화의 시대를 완전히 비켜갈 수는 없었는데, 그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그 해 여름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른바 ‘김포공항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미국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윤복희가 김포공항에 내릴 때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내린 사건이다(참고로 그때는 인천공항이 없었다). 미니스커트는 연예인의 의상에 그치지 않고 멋쟁이 아가씨들의 필수품이 되었고 그 뒤 여성들의 치맛자락은 최신 유행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에서는 지워졌지만 ‘1967년 무렵’은 가요계에서도 신풍과 신인의 등장을 회고해 볼 수 있다.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패티 김, 김상희, 이금희, 현미, 최양숙 등 여가수들,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등 남가수들은 ‘클래식풍’의 품격 있는 가요를 남겼다.

 

이 사람들의 히트곡에 대해 언급하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박재란의 ‘순애’,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티 김의 ‘초우’ 등이 1960년대 중후반 방송가요계에서 환대받은 음악의 분위기를 전해줄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가수도 가수지만 박춘석, 길옥윤, 이봉조, 김호길, 김인배, 김강섭 등 ‘악단장과 연주자와 작곡가’를 겸했던 스타 음악인들의 모습을 함께 불러온다.

 

이런 곡들에 이르게 되면 1960년대 초 손석우 등이 시도했지만 대중성을 얻지는 못했던 7음계의 멜로디가 대중의 기호와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는 반음계를 시도한 곡도 히트곡의 반열에 오른 일도 있는데 1967년 ‘혜성같은 신인’, ‘여고생 가수’로 정상에 등극한 정훈희가 부른 ‘안개’(이봉조 작곡)가 대표적이다. 따지고 보면 1967년 가요계에는 신인 가수들이 정상 부근까지 올라 일종의 세대교체를 이룬 해이기도 했다.

 

한편 정훈희와 더불어 이 해 신인으로 가요계에 이름을 선명히 남긴 사람으로는 차중락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 ‘에니싱 댓츠 파트 오브 미’의 번안곡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다가 1968년 11월 정말 낙엽 따라 가 버린 그의 짧은 생애는 김정호,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으로 이어지는 ‘요절 가수’의 신호탄을 보는 것만 같다.

 

정훈희와 차중락으로 대표되는 1967년의 신인가수들은 청년문화의 기수였을까. 그렇지만 이들이 표상한 청년문화는 아직 자기 발로 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이들이 주 무대로 활동했던 방송무대와 일반무대(극장 쇼)에서는 각기 보수적인 관행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점에서 본격적 파란이 발생한 시점은 1969년께 언젠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을 말할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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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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