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728x90
반응형

 

 

한국팝의 사건사고60년 - 25. 어니언스, 김정호 그리고 ‘인건마 편곡집’

 

‘쉘부르 사단’ 에 여고생 가슴은 살랑∼ 
 

 

» 어니언스의 1974년 음반 <작은 새/초저녁별(안건마 편곡집)> 표지.

 

1970년대 중엽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길어지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해명하기로 하고 1973년 말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 해의 대중가요계를 결산하는 이 무렵의 기사들은 한결같이 한 해 동안 일어난 대중가요계의 ‘지각변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각변동’의 내용은 대체로 ‘팝 계열’이 ‘트로트 계열’을 압도하고 점차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젊은 음악’이 음반도 잘 팔리고, 방송도 잘 타면서 주류로 부상한 중요한 기점이었다.

 

당시 지각변동을 일으킨 문제의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대박으로 손꼽히는 곡은 패티 김의 ‘이별’, 장현의 ‘마른 잎’, 이장희의 ‘그건 너’ 세 곡이다.

 

이들 가수와 노래 뒤에 작곡과 편곡과 연주를 맡아준 별도의 인물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패티 김 뒤에는 길옥윤이, 장현 뒤에는 신중현이, 이장희 뒤에는 강근식이 있었다는 점 등등. 패티 김은 ‘젊은 음악’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나머지 두 곡은 각각 ‘솔’과 ‘포크’라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두면 더 좋겠다.

 

그런데 1973년 중반부터 시작해 1974년으로 해를 넘기면서 또 한 명의 혜성 같은 신인이 대박 행진에 명함을 내밀었다. 주인공은 임창제와 이수영으로 이루어진 남성 듀엣 어니언스(Onions)로 ‘작은 새’, ‘편지’, ‘저 별과 달을’, ‘사랑의 진실’ 등 음반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을 히트시키는 기염을 토하면서 방송가, 음반가, 살롱가 모두에서 고른 성공을 거두었다.

 

‘말빨’이 받쳐 주는 임창제와 ‘얼굴’이 받쳐 주는 이수영은 갈래머리에 하얀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의 가슴을 살랑거리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임창제와 이수영이 문희준과 강타를 20년 전에 예견했다면 지나친 말일까? 재미로 해 본 말이니 항의 없기를!).

 

 

이들의 위세는 당시 음악잡지에 나온 기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대강당에서 지난 74년 5월 4일 열렸던 ‘어니언스’의 리사이틀은 모여든 관객들을 제 시간에 입장시키지 않고 있다가 관객들이 강당에서 이대교문까지 장사진을 이루는 등 대학가에서 흔치 않은 진풍경을 보인 뒤에야 뒤늦게 시작되었다. (중략) 교복차림의 중고교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 관객들은….” (부연하면 이들은 1973년 9월 드라마센터에서 이미 리사이틀을 가진 상태였다).

 

해가 바뀌기 전 이수영은 충무로에 진출하여 영화 <그대의 찬 손>(감독: 박종호)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가 이수영의 데뷔작인 것은 물론 배우 유지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까지 기억한다면 당시 여고생이었을 확률이 높고, “이것은 앤티 포르노 넌프리섹스 영화다(anti-porno, non-free sex)”라는 포스터의 문구가 기억나는 사람이라면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마음은 청춘인 사람일 것이다.

 

 

그 전부터 ‘어니언스’는 또 하나의 가십을 제공했다. 다름 아니라 자작곡으로 알려졌던 ‘어니언스’의 히트곡들 대부분이 ‘편지’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이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저작권 분쟁’이나 ‘표절 사태’ 같은 험한 사건을 낳지는 않은 채 원만하게 문제는 해결되었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이 주옥같은 곡들의 진짜 주인공인 김정호가 ‘어니언스’에 이어 또 하나의 ‘젊은이의 우상’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름 모를 소녀’라는 또 하나의 명곡과 더불어….

 

이들을 발굴하고 스타로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문화방송의 피디이자 디제이였던 이종환, 그리고 그와 인척지간인 애플 레코드의 김웅일이었다. 지금도 대도시 교외에 프랜차이즈점을 거느린 음악실 쉘부르는 ‘이종환 사단’에 속하는 통기타 가수들이 스타가 되기 전 거쳐갔던 산실이었다.

 

 

‘어니언스’와 김정호 외에도 홍민, 석찬, 이영식, 이수만, 채은옥, 김인순, 김세화, 현혜미, 권태수, 남궁옥분 등이 쉘부르를 거쳐간 인맥들의 아주 짧은 리스트다.

 

그런데 이들의 히트곡들의 음악 감독은 따로 있었다. ‘안건마 편곡집’이라는 문구가 기억난다면, 그가 당시 정성조(현 KBS관현악단장)와 더불어 음악 신동으로 불리던 인물이자 안건마 악단을 이끌면서 무대와 스튜디오를 오가며 숱한 명연(名演)을 들려주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다 잊혀진 이야기다.

 

따라서 이 글에 등장한 이름들과 더불어 ‘이수미’나 ‘박성원’과 관련된 스캔들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가로 커밍 아웃해야 한다. 당시 부모와 교사의 눈을 피해 주간지와 스포츠신문을 탐독했던 그 열정이 지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겠지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