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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28 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 음악은 누구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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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 음악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나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지만 잘 알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음악을 들었을 때, 대체 무엇을 마음에 느끼어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 음악을 알았다는 것이 될까.


"나는 음치여서 음악은 모르겠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음치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귀가 전혀, 혹은 거의 들리지 않는, 즉 무언가 병적인 장애때문에 음을 느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머지 않아 그런 불행한 사람들도 아마 어떤 방법으로든지 음을 느끼게 되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되는 연구가 완정될 지도 모르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장애자만은 이 문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그러면 보통 음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음치란 이른바 '가락이 맞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즉 귀에는 이상이 없더라도 자기 스스로 무언가 노래를 부르려 하면 전혀 엉뚱한 가락이 되고 마는 사람이 있다. 또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정확한 음정을 잡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전문 음악가 중에도 의외로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귀의 감각은 대개 정확하다. 그래서 남의 '가락이 맞지 않은' 것은 잘 알면셔도 막상 자기가 노래할 차례가 되면 무의식 중에, 또는 의식하면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이 가락을 틀리게 부르고 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른바 음치는 발성의 올바른 훈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음악을 듣고 감상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진짜 음치란 음의 높이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리학자는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말하고 있다. 음악을 즐길 수 없을 정도의 선천적인 음치란 이 세상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치이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음악이 나타내는 의미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또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혹은 또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라는 겸손일는지도 모른다. 

 

또한 음악을 듣는 것은 따분하거나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음치'라고 단정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음악이 나타내는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음악을 듣고 그 속에서 무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구체적인 것을 기대하기 쉽다.


예컨대 이 음악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든지, 어떤 풍경, 어떤 인물을 그리고 있다든지, 또는 좀더 추상적인 것으로, 예컨대 이 음악은 작곡자가 어떤 기분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연인과 헤어진 슬픔을 그린 것일까 혹은 애국의 열정을 그린 것일까 하는 식으로 무언가 우리의 경험에 연결되는 회화적, 문화적인 것으로 음악을 바꿔 놓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작곡자가 이것을 만들었을 때의 심경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열심히 상상해 보기도 하며, 또 제삼자의 그럴싸한 해설에서 그것을 구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그런 구체적인 것을 포착할 수 없을 때에는 이것은 통 알 수 없는 음악이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음악 이외의 것에서 구하려 하는 일이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음악 그 자체의 모습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문학이나 회화와 비슷한 상상을 음악 속에서 찾아내려 한다거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말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도리어 음악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있다.

 


악곡은 노래나 연주에 의해 각양 각색의 음의 흐름으로써 그 아름다운을 말해 주고 있다. 음악의 의미란 이 이외의 것이 아니다. 갖가지 음이 여러 가지로 편성되거나 단속되기도 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며 진행해 간다.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은 이 아름다움을 마음에 느끼어 이해하는 일이다.   음악의 감상은 먼저 음악의 재료인 '음'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

 

어떤 명인이나 거장이 연주하는 명곡이건, 서툰 아마추어의 기예이건, 결국은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는 '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청각의 자극만으로는 아직 '음악'으로서 감상케 하는 작용이 되지 않느다. 그 자극이 듣는 사람이 지닌 감성,, 사상, 경험, 교양, 취미, 거기에 다시 인생관, 윤리관, 종교심 등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정신 구조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감상이라는 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그 정신 구조가 풍부하면 음악의 감상이라는 활동도 풍부하고 활발하게 된다. 그 정신 상태가 단순하고 소박하다면 감상의 작용도 단순해지고, 만약 이것이 현저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그 감상도 또한 거기에 따라 일그러진 것이 된다.

 

예컨대 어린이는 어린이 나름의 단순한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서, 또 어린이다운 솔직한 감성을 가지고 감상하며, 지식이나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깊은 교양을 지닌 사람이 만약 음악을 감상하려 한다면 그 나름대로 깊고 풍부하게 감상하는 작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음악의 의미'란 어디까지나 음악 그 자체에 있으므로 음악 외에 어떤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듣는 사람의 정신 구조가 풍부함으로써 여러 가지 경험이나 연상이 그 음악적 '의미'와 결부되는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령 음악과 관계 없는 연상이라 할지라도 그 음악을 깊이 음미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교향곡을 듣고 있다고 하자. 듣고 있는 동안에 문득 어린 시절에 뛰어놀던 고향의 숲이나 언덕이 마음에 떠올랐다고 하자.


음악의 진행과 함께 고향의 추억도 잇달아 차례차례 발전하여 즐거웠던 회상, 슬픈 날의 추억 등이 마음 속을 오갈 것이다. 원래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연상은 그 교향곡의 작곡자가 전혀 모르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서 듣는 이의 마음에 자연히 솟아오른 정서를 부정해 버릴 필요는 없다. 이 경우 감상하는 사람의 기분은 작곡자의 의도에 관계없이 그 '연주된 음의 모습', 즉 음악적인 의미에 단단히 결부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새삼스레 '음의 모습'으로서 느껴진 것에 무언가 구체적인 연상을 결부시키려고 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아는' 것이지 남이 '알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슬픈 음악이라든가, 즐거운 곡이라든가 하는 해설 등에 의해서, 자기가 이제부터 들으려 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해설서에 무엇이라 적혀 있건, 또한 작곡자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즐거운가 슬픈가 하는 감정은 실제로 자기가 느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좀더 복잡한 갖가지 음악적인 의미에 이르러서는 정말 자기의 마음의 작용에 의해 아는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음악의 감상, 곧 음악을 알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주의 깊게 잘 들어보아야 한다. 만약 한번 듣고 미처 못 들은 곳이 많다고 생각하거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의 지식, 교양, 취미 등에 따라 각각 자기식으로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비추어 볼 일이다.


음악은 처음부터 회화, 조각 혹은 문학처럼 사물이나 사건을 묘사하려 하는 예술이 아니다. 각자의 기분을 음의 미적인 구성에 의해 말하려 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하나의 같은 악곡이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에 따라 그것을 느끼는 방법에 대단한 개인차를 나타낸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일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흐름이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음악은 인간의 창작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 과정도 긴 역사를 통해 짜 올려져 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형식상의 약속이나 유형이 존재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에 관해 다소의 예비 지식을 갖고 있으면, 이것이 간접으로 감상의 작용을 돕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에 생기는 지식욕이나 의문은 순수하게 감상하려 하는 마음의 작용에 대해 언제나 저항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건 어떤 체험을 하는 경우에 조금이라도 사정을 알고 있으면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주의력이 잘 미쳐서 대상의 참된 모습을 잘 응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음악을 '안다'는 비결은 잘 들어보는 일에서 비롯된다. 만약 알 수 없다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지식욕이나 의문이 저항이 되고 있든가, 혹은 아무래도 좋은 일, 즉 음악과 관계가 없는 일을 그 음악 속에서 굳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들어보고 따분하면 따분한 대로, 시시하면 시시한 대로, 이것을 듣고 무엇인가를 느꼈다면 그 느낌을 다시 잘 음미해
본다. 그러면 거기에 여러 가지 의문도 생기고 지식도 구해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전을 펼쳐본다든가 남에게 물어본다든가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지식을 흡수하여 의문을 풀어 둘 일이다. 그리고 음악을 여러 면에서 깊이 연구하고, 동시에 자기의 취미를 다양하게 발휘해서 차츰 높고 좀더 풍부하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찾아 보자. 

 

음악을 안다는 것은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음악 그 자체의 모습을 아는 것이 음악의 기분을 안다는 일이다.

 

 

베토벤은 자신이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 말하고 있었던 "미사 솔렘니스"(장엄미사곡) 총보의 첫머리에,   "이것은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듣는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라는 뜻의 글을 적은 바 있지만, 이는 음악을 안다는 일의 모든 것을 설명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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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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