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오페라'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12.02 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5. 성악곡의 종류
728x90
반응형

 

 

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5. 성악곡의 종류

 

(1) 민요
갖가지 노래 중에서 각기 국가나 민족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민요이다. 민요에는 그 민족 특유의 소박한 감정과 일상생활, 언어, 동작 등이 바탕이 되어, 여기에 시대적 색채가 더해진, 독특한 음악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지방마다 커다란 특색이 있다.


민요의 가락은 각 민족의 언어의 억양이나 일반적인 생활 감정의 특색과 관련이 있다. 민요의 리듬도 그 생활 감정의 특징과 특수한 노동 작업, 민족 무도 등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또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악기의 특징, 즉 어떤 특수한 음계에만 알맞은 피리라든가, 독특한 리듬을 나타내는 데 적절한 타악기류가 그 민요의 가락이나 리듬을 고정시키고 있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민요에는 그 민족의 생활과 감정이 가장 자유롭고 소박한 형태로 음악화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많은 민족이 각각 옛날부터 갖고 있던 취미나 생활이 음악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민요는 민족의 생활에서 직접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시의 내용은 그 생활 환경이나 풍경, 행사 등을 그린 것이 많이 있다. 또 종교적인 노래, 연애의 노래, 시정의 노래, 노동의 노래, 전쟁의 노래, 자장가, 전설이나 이야기의 노래, 무도의 노래, 도박의 노래, 사냥의 노래 등 어느 것이나 그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있다.

 

또 그 가사의 구절이 극단적으로 각 고장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민요의 가사는 대개는 단순하고
짧은 것이 많지만, 때로는 또 이야기노래풍의 장대한 시를 가진 것도 있다.


곡은 형식상으로는 간단한 것이 많은데 어느 것이나 짧은 가락을 몇번이고 반복하는 '유절가곡'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절가곡이란 예컨대 한국에서 보통 불리는 국민학교의 동요, 가곡, 교가 혹은 찬송가처럼 같은 각수와 같은 행수의 구를 1절, 2절, 3절로 늘어놓은 시를 각각 같은 가락으로 반복하는 것으로서, 한국의 "아리랑"이나 "바위 고개"는 모두 이
유절가곡이다.

 


본래의 민요는 오랜 시대부터 그 고장에서 누구인지도 모르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 많아서, 그 작사자의 이름도 작곡자의 이름도 전해지고 있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그리 오랜 것이 아니고 뚜렷하게 알려진 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그 민족의 정신이나 감정과 일치하여 널리 불려지며, 또 외국인이 이것을 들어도 곧 그 고장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민요처럼 생각할 만큼 그 민족 특유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노래는 일반적으로 민요로써 다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아일랜드의 민요로서 한국에서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 "한 떨기 장미꽃"과 같은 아름다운 노래는 18세기 말의 아일랜드의 시인 토머스 무어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미국의 포스터가 만든 "켄터키 옛집", "고향 사람들", "올드 블랙 조" 등도 미국 민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민요는 또 시대나 환경과 함계 변하고 있다. 정말 원형 그대로의 민요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장에서 노인들이 불러 전해진 것이라든가, 혹은 학문상의 필요로 특별한 방법을 강구하여 원형을 보존하려 했던 경우 외에는 별로 현대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또 이 선율만을 따서 음악회용의 독창곡이나 합창곡으로 편곡하고, 피아노 반주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다시 그 선율이나 리듬을 따서 이것을 관현악요으로 편곡하기도 하고 탱고나 재즈로 편곡하는 일도 있다. 가요곡의 가수가 오케스트라 반주로 감미롭게 부르는 민요는 민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지 모르지만 고장에 전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유감스런 일로 생각된다. 그것은 어떤 고장에서 태어나 자란 노래 치고는 너무 다른 느낌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러한 방법으로 퍼지고 전해져 있기에 뛰어난 민요가 한 지방에 파묻히거나 멸망하지 않고 전세계에서 불려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민요는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의 예술적인 음악이나 대중적인 음악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리고 각기 시대에 따른 신선한 감각으로써 대중과 접촉하고 시대의 추이, 환경의 변천과 함께 변해 가는 민족의 마음 속에 길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요가 그 원형을 여러 가지로 바꿔 가는 것은 시대의 추세이며 이것을 막을 수는 없다. 또 그러기에 어느 시대에나 민요는 대중과 함계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새로운 유행가 등이 만들어졌다가는 사라지고 유행했다가는 사라져 가는 모습이 요즈음처럼 템포가 빠른 세상에서는 참으로 어지러울 정도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이따금 민요조 붐 등이니 하여 민요를 소재로 한 유행가는 다른 많은 유행가를 훨씬 앞질러 히트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민요가 이따금 새로 단장을 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또 이렇게 변해 가면 민요는 처음에 어떤 형태였을까 하는 것이 점점 알 수 없게 되어 버릴 염려가 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민요를 그대로 보존하려 하는 운동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혹은 세밀하게 채보하거나 녹음하기도 하여 이것을 수집 보존하는 일이 중요시되고 있다. 

 

민요가 언제나 그 시대의 시대 감각이나 생활의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양을 바꾸어 가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근원을 잃지 않도록 잘 연구해서 보존하는 것도 더욱 중요한 일이다.


지금 전세계의 작곡계에서 '음악의 민족성'이라는 것이 크게 주장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음악 속에 민요나 민족무곡을 도입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은 아니고, 하나의 민족이 먼 옛날부터 갖고 있는 민요나 춤의 음악이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것을 잘 연구하여, 그 민족 고유의 음악을 기반으로 해서 거기에 새롭고 자유로운 음악을 쌓아올려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민요의 충분한 연구와 보존이 필요한 동시에 작곡가에게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 하는 의욕과 역량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가곡은 물론이고 그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의 주제가 되고 있는 선율(가락)은 민요에 뿌리 박은 것이 많으며, 민족무곡이나 민요는 고금의 대작곡가들에게 있어 예술의 고향과 같은 것이었다.



(2) 예술가곡
민요와는 달리 작곡가의 창작에 의해 태어난 가곡을 예술가곡이라고 부른다. 독일어의 '리트'에 해당하는 말이다. 리트(가곡)라고 하면 우리들은 곧 슈베르트를 생각케 된다.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 일컬어지며 불과 32년의 짧은 일생 동안에 주옥같이 아름다운 예술적인 가곡을 6백곡 이상이나 만들어 불후의 이름을 남긴 천재이다. 그 중에는 유명한 "들장미"나 "보리수"와 같은 민요풍의 것도 있으며, 괴테의 "마왕"이나 파우스트 중의 "실을 잣는 그레트헨"에 곡을 붙인 서사시풍의 극적인 곡도 있다. 

 

긴 것도 짧은 것도 있지만, 어느 것이나 시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여 이를 노래의 가락과 피아노의 반주로 나타내고 있다. 그 시와 음악은 흔연히 하나가 되어 섬세한 정서와 힘찬 열정을 남김없이 표현한다.


가곡의 형식은 크게 나누어 '유절가곡'과 '통작가곡'의 두 종류가 된다. 유절가곡이란 앞의 '민요'의 항에서 말했듯이 운율이 갖춰진 몇 줄의 가사가 몇 절인가 있고 이것을 동일한 선율로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다. 

 

즉, 가사는 각각 다르지만, 같은 선율을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한번만 노래의 선율을 외어 버리면 그 다음은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2절, 3절 등, 얼마든지 가사가 있는 만큼 계속 부를 수 있으므로 비교적 부르기 쉬워서, 민요라든가 동요, 가곡, 교가 등은 이 형식에 의한 것이 많다.


그런데 예술가곡의 사고방식, 즉 시가 지닌 의미나 심정을 음악적으로 그려 가는 것이 가곡이라고 한다면 시가 처음부터 차츰 진행함에 따라 그 심정과 의미도 차츰 변해 가는 경우에, 유절가곡처럼 동일한 선율을 반복해서 부르면 종종 시의 내용과 관계없이 그 선율로 불러야 한다는 일이 생긴다. 

 

시의 의미가 바뀌면 그 선율과 반주도 이것을 잘 표현하도록 바꾸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하나의 선율을 반복하기만 하는 유절가곡으로는 불편하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시의 내용에 따라 곡도 또한 시시각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통작가곡'이라고 한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향기 높은 시는 한결같이 똑같은 선율의 반복이 없고, 언제나 시와 함께 노래의 선율도 바뀌어 가는 통작가곡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컨대 슈베르트의 리트 등도 그 시에 따라서 각각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순한 민요풍의 "들장미"나 "자장가"처럼 소바한 느낌을 노래한 것은 유절가곡으로 작곡되고 있지만, 또 "마왕" 등을 들으면 완전히 모양이 바뀌고 있다. 

 

이것은 통작가곡의 형식이며, 괴테의 유명한 서사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가락은 하나도 없을 만큼 이야기의 내용과 일치하게 작곡되어 있다. 

 

피아노의 전주 부분부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의 긴장된 정경을 그려내고 시시각각 변하는 내용을 항상 극적인 박력으로써 밀고 나아간다. 그러나 슈베르트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은 하나의 가곡 속에 유절가곡과 통작가곡의 두가지 요소를 부여하거나, 혹은 양쪽을 편성해서 작곡한 것도 많이 쓰고 있다. 

 

어쨌든 시의 내용은 그 의미와 감정을 노래의 가락과 악기의 반주에 의해 잘 어울리게 그려내려고 하는 것이 예술가곡의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다.

 


(3) 가사의 문제
예술가곡은 이처럼 시의 의미나 심정이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감상할 때 그 시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이 가곡의 맛을 절반도 이해할 수 없는 셈이다. 

 

듣는 이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이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외국의 예술가곡을 감상하기 위해 가사의 번역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영어나 독일어, 그 밖의 외국어로 만들어진 노래의 말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부르는 일은 종래에도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이 외국의 노래를 감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컨대 슈베르트가 괴테의 어떤 시를 읽고 감명을 받고 이것을 노래하기 위한 음악을 썼을 때에는 그 시가 지닌 아름답고 깊은 의미에 감동했음은 물론이지만, 또 그는 그 원 시가 지닌 발음의 아름다움과 그 말의 발음에 의해 드러나는 감정, 또한 발음에서 생기는 리듬의 흐름까지도 그 음악 전체 속에 예정했으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선율은 그대로 두고 말만을 한국어로 바꿔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한국어로 고치면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도 그 의미를 잘 알아, 이 가곡을 맛보는 데는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슈베르트를 감동시킨 '말의 울림'이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역어를 붙이는 방식에 따라서는 선율 속의 섬세한 어세의 강약이 변하거나 모음과 자음과의 관계, 예컨대 특히 자음이 강하게 울리는 독일어와 우리 말과는 그 느낌은 매우 달라진다. 요컨대 원어와 역어가 '문학적'으로는 상당히 가깝다고 할지라도 '음악적'으로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또 번역된 시가 한국어의 시로 잘 되어 있다면 모르거니와 혹시 서툴게 번역된 가사라도 붙여져 있다면 노래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도 몹시 흥이 깨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가사를 번역한다는 일이 음악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는가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음악을 잘 이해하는 사람에 의해 능란하게 만들어진 번역 가사가 붙은 곡 등은 때로는 원어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기 마련이다. 

 

또한 그것을 익숙하게 불러서 완전히 한국의 가곡처럼 되고만 번역 가사는 충분히 그 원곡의 의미와 심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런 번역 가사라면 노래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잘 알 수 있고, 음악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손상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그래도 원곡을 들었을 때와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민요 등은 그 재미가 주로 각기 민족성을 강하게 드러낸 선율에 있으며, 또 가사의 의미나 감정을 그다지 엄밀하게 곡과 결부시킨 것도 적고 유절가곡이 많으므로 보통은 번역 가사로 부르는 일이 대부분이다.  또한 전혀 의미가 다른 가사를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들이 슈베르트를 비롯해서 외국의 예술가곡을 가능한한 완전하게 감상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컨대 슈베르트를 듣는 경우,가령 우리가 독일어를 많이 공부하여 그 시를 알고 또 독일인의 전통적인 생활 감정이나 그 환경을 충분히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 독일의 예술가곡이 한국인인 우리에게 마음으로부터 이해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것을 가능한 범위에서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의 의미를 미리 번역해 달라든가, 혹은 스스로 공부해서 잘 읽어 본 다음에 '원어'로 능숙하게 불려지는 것을 듣고 감상해 볼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또 스스로 불러서 즐기는 데는 무리하게 서툰 독일어로 부르기보다는 조금 느낌은 달라도 되도록 번역가사를 택해 그 내용을 잘 이해하면서 부르는 것이 좋겠다. 만약 어휘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양 말고 원어로 불러 그 원래의 말이 아름다운 음악과 어떻게 밀접하게 결부되고 잘 조화되어 울리는가 하는 것을 잘 음미해 보면 더욱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예술가곡(리트)에 관하여 여기서는 슈베르트를 예로 들었지만, 슈베르트에 이어지는 독일 낭만파의 작곡가들은 어느 사람이나 뛰어난 예술가곡을 많이 썼다.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볼프, 말러 등의 대가들은 모두들 독일의 민요에 뿌리 박은 아름다운 불후의 가곡을 남겼다.


 
(4) 유행가
유행가는 넓은 범위의 대중의 노래이다. 그리고 항상 그 유행은 변해서, 유행하는가 싶으면 곧 잊혀져 버리고, 잊었다고 생각한 노래가 어느 사이엔가 부활해서 유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언제나 대중의 생활, 사회의 변천과 함께 변해 간다. 

 

또 유행가는 각각 독특한 민족성, 국민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행가는 시대에 따른 민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유행가가 민요와 다른 점은 민요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오래 불러서 전해진 것임에 대해, 유행가는 항상 새로 만들어져 세태에 영합하고 종종 상업주의에 이용당하기 때문에 그 생명이 매우 짧다는 것이 그 특색이다.


그러나 물론 가사나 작곡도 뛰어난 것은 오래 불러져 마침내 민요처럼 되는 일도 종종 있다. 또 유행가는 대중의 노래이기 때문에 부르기 쉬운 곡, 이해하기 쉬운 가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대중의 교양이 향상되고 취미가 풍부해지면 거기에 따라 유행가도 뛰어난 좋은 노래가 널리 보급되어 긴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또 세태가 밝고 국민생활이 풍부하면 유행가도 이를 반영하고, 그 반대면 빈약하고 저질의 노래가 유행하는 것은 세계 각국의 예를 보더라도 명백한 일이다.



(5) 종교음악
서양음악에서 종교음악이라고 하면 거의 모두가 그리스도교 음악이다. 물론 오랜 시대부터 유대교의 음악, 혹은 마호멧교의 음악도 존재했고, 드물게는 그 음악의 요소를 따서 작곡가가 이것을 예술적인 음악 작품으로 만든 예도 있지만, 이른바 대작곡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그리스도교이며, 그 사람들이 실제의 요구에 따라 쓰거나 또는 후세에까지 각각 교회에서 불려질 만한 대작을 남기려 생각하여 작곡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고금의 명곡이라 일컬어지는 걸작은 모두 그리스도교 음악으로서 전해지고 있는 작품이 많은 것이다. 

 

그러한 명곡은 처음에는 교회에서 엄숙한 의식의 음악으로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에 가장 아름다운 작품만은 다른 명곡들과 함께 교회의 의식에 떠나 음악회나 레코드로 감상용 음악으로서 친해지고 있는 것도 적지않다. 


불교에도 음악은 있다. 경전의 낭독(이른바 경)은 음악적 요소를 다분히 갖고 있지만, 이것이 뛰어난 작곡가에 의해 연주되거나 작곡되기도 하는 습관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극히 좁은 형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래된 것을 보존하는 데 그쳤으며, 예술적 음악으로 후세 사람들이 감상하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찬불가라든가 불교음악이라든가 하는 창작이 드디어 행해지게 되었다.


어쨌듯 서양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생활양식, 풍속이나 습관상으로도 음악이 담당하는 역할은 크고, 또 각 시대의 대표적인 대작곡자가 거의 모두 그 음악에 심혈을 기울여 뛰어난 대작을 썼으므로, 종교음악은 모든 서양음악 중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음악이 처음으로 예술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멀리 4세기, 밀라노의 사교 성 암브로지우스로 거슬러 올라가며, 더욱 이것이 조직적인 발전을 본 것은 6세기의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시대부터이다.

 


① 그레고리오 성가
현재도 로마 정교에서 정식 성가로 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무반주, 단음의 것이며, 그 선율은 8종류의 고대 선법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레고리오 1세 무렵에는 아직 하모니(화성)가 없었고, 지금 불려지고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도 또한 이른바 단성성가(플레인 찬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음악에 조직적인 화성, 즉 다른 높이의 음을 2개 이상 짜맞추거나 2개 이상의 다른 선율을 합리적으로 짜맞추는 방법은 10세기 경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다.

 


② 코랄
16세기 초에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대종교가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주창하고 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들어온 것으로 4부합창에 의한 단순한 성가이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이것이며 모두 유절가곡을 채용한 것이다. 

 

루터는 음악에 관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코랄과 시와 곡을 모두 많이 만들어 이것을 퍼뜨렸다.

 

 

③ 미사곡
미사는 가톨릭교의 중요한 의식의 하나로서, 이 때 외에는 기도문이 라틴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초에는 이것이 음악 없이 읽었던 것인데, 후에는 여기에 가락이 붙어 노래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음악이 없는 경우를 '낮은 미사' 또는 '작은 미사'라고 하며, 음악으로 부르는 경우를 '높은 미사' 또는 '대미사'(미사 솔렘니스), 혹은 '노래미사'라고 했는데, 차츰 그 형식, 내용이 정비되어 15세기 경에는 일정한 형식을 가졌고, 일관된 합창음악으로서 작곡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가사는 모두 라틴어가 사용되고 이 음악을 '미사곡'이라고 한다.


미사곡은 통상의 경우, 다음의 5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키리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제2장 글로리아(영광의 찬가)
  제3장 크레도(신앙선언)
  제4장 상크투스(감사의 찬가) 및 베네딕투스(축복해 주소서)
  제5장 야누스 데이(평화의 찬가)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그레고리오 성가풍의 단선율로 부르고 후에 무반주의 합창곡도 불려졌지만, 근세에 이르러 대관현악이나 오르간의 반주를 지닌 독주, 중창, 혼성합창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연주가 되었다.


바하의 b단조 "대미사", 베토벤의 D단조 "장엄미사"(미사 솔렘니스)등은 현존하는 최대의 미사곡이며, 모짜르트의 "대관식 미사"는 우미하고 화려한 곡의 정취로 유명하다. 

 

또 앞에서 말했듯이 미사곡은 모두 라틴어의 가사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드물게 보이는 예외로서 독일어로 만들어진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가 있는데 이것은 명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④ 레퀴엠(진혼곡)
레퀴엠은 '사자를 위한 미사'로서 그 기원은 미사와 거의 같은 무렵이다. 미사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외로서 브람스는 자기의 죽은 어머니를 위해 유명한 "독일 레퀴엠"(독일어)을 만들었다.


내용은 대체로 미사곡과 마찬가지여서,   제1장 레퀴엠(requiem 영원한 안식을 주옵소서), 키리에(Kyrie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제2장 디에스 이레(Dies irae 진노의 날)   제3장 도미네 예수(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여)
제4장 상크투스(Sanctus 거룩할 진저)   제5장 야누스 데이(Agnus dei 신의 어린양) 을 표준으로 하고 그 규모에 따라 좀더 많은 장을 넣는 수도 있다.


모짜르트의 마지막 대작인 d단조의 "레퀴엠"은 실로 12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밖에 포레, 베르디 등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대걸작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⑤ 오라토리오
성서 속의 이야기를 독창, 중창, 합창으로 대규모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야기는 모두 기복에 넘친 흥미 깊은 것들이다.


현재는 이것을 연주회 형식으로 부르게 되어 있지만 15, 16세기 경에는 오페라와 같은 연극 형식으로 상연한 예도 있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을 '신극'이라 번역한 적도 있다. 또한 오라토리오는 성담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오라토리오를 많이 만든 것은 헨델이다. 그는 1720년에 쓴 "에스테를"를 비롯해서 "사울", "이집트의 이스라엘 사람", "삼손", "마카바이오스의 주더스", "솔로몬"등의 걸작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구세주"(메시아)는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 "구세주"가 맨처음 연주되었을 때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가 울려 퍼지자 때마침 임석해 있던 영국왕 조지 1세는 너무나 엄숙해서 무의식 중에 기립하여 들었다고 해서 그 이래 영국에서는 연주회에서 이것이 불려질 때 청중은 일제히 기립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하이든의 작품에도 "천지창조" 와 "사계"의 2대 걸작이 있으며, 둘 다 그 음악의 아름다움은 종교음악이라는 냄새나는 관념을 떠나 실로 즐겁게 감상되고 있다. 

 

특히 그 "천지창조"가 처음 연주되었을 때, 당시는 적국의 관계에 있었던 나폴레옹 1세도 이것을 듣고 몹시 감격했다고 한다.

 


⑥ 패션(수난곡)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 음악으로 형식은 대략 오라토리오와 마찬가지로 독창, 중창, 합창에 관현악이나 오르간을 첨가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단지 테너 독창자가 항상 이야기의 추이를 레치타티보로 설명해 가는 점이 특징이다.


바하의 작품에서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의 두 곡은 모두 대걸작이다.   오라토리오나 수난곡은 미사곡이나 레퀴엠과는 달리 의식의 음악은 아니고 좀더 일반 대상으로 충분히 흥미롭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가사도 라틴어가  아니라 각각 그 나라의 말을 사용하여, 듣는 사람은 누구라도 잘 알 수 있도록 불려진다.

 


⑦ 칸타타
이 말의 기원은 16세기경에 이탈리아에서 악기를 울리는 음악을 '소나타'라고 했음에 대해 노래하는 곡을 '칸타타'라고 했던 데서 시작되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는 상당히 넓다. 

 

바하는 종교적인 독창곡이나 합창곡에다 관현악이나 실내악의 반주를 붙인 "교회 칸타타"와, 또 서정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가사를 가진 독창곡이나 합창곡의 "세속 칸타타"를 많이 썼다. 

 

세속 칸타타란 대중적이고 알기 쉬운 내용의 것이기 때문에 각각 자국어 가사를 사용한다. 베토벤의 서정적인 노래 "아델라이데"도 하나의 칸타타로서 발표된 바 있지만 현대에서는 역시 이것도 예술가곡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칸타타'라는 말을 한국에서 교선곡이라 번역한 적도 있지만 이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역어이다.

 


⑧ 모텟토
13세기 경부터 시작된 교회용의 독창곡, 또는 합창곡으로서 경전, 기도문 등에서 그 가사를 따왔다. 형식은 자유로와 초기에는 반주 없는 합창곡뿐이었지만 후에 오르간이나 관현악의 반주를 붙인 것이 많아지고, 차츰 발달함에 따라 독창을 포함하는 몇개의 장을 갖도록 만들어졌다.


바하는 앞에서 말한 코랄을 이 속에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모텟토라고 하면 매우 차분한 노래처럼 생각되지만 상당히 즐거운 것도 있으며, 모짜르트의 유명한 "알렐루야"라는 아름다운 이탈리아풍의 소프라노 독창곡은 그의 모텟토 "엑술타테 유빌라테" 속의 한 장이다.



(6) 오페라와 악극
오페라의 기원을 물으면 아마 2천5백년 전의 그리스 비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라는 명칭이 생기고 지금의 오페라와 가까운 형태가 된 것은 지금부터 3백50년 전즘, 즉 16세기 말에서 17세기를 걸쳐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비극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뒤의 일이다.


당시 플로렌스에서 페리라든가 캇치니라는 작곡가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후 로마와 베니스로 퍼졌으며, 마침내 몬테베르디가 나타나 완전히 오늘날의 오페라의 기초를 구축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이보다 조금 늦게 쉬쯔라는 사람이, 또 프랑스에서는 라모, 륄리, 영국에서는 퍼셀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직접 간접으로 수입해서 각 나라들의 전설이나 독특한 숫법으로 오페라를 만들었다.


오페라란 음악과 연극과의 종합예술이라고 하는데 주로 음악을 하는데 주로 음악을 가지고 연기하는 연극일까? 그렇지 않으면 또 연극이 있는 음악일까? 

 

이 의문은 19세기에 이르러 바그너가 나타나고 나서 한참 동안 논의된 것인데, 원래의 오페라란 연극을 가미한 음악의 연주 형태의 일종으로 발달해 왔다. 

 

이것은 무대장치를 하고 의상을 입고 동작을 하면서 노래 부른다고 하는 매우 사치스러운 음악회와 같은 것이다. 노래는 독창, 중창, 합창의 모든 형식을 자유롭고 풍부하게 망라하고 있다. 

 

반주로서는 그 시대의 가장 큰 편성을 지닌 관현악이 사용된다. 노래의 반주뿐만 아니라 관현악만으로 연주되는 서곡과 전주곡, 간주곡이나 발레의 음악, 행진곡 등도 많이 너온다. 또 많은 오페라에는 화려한 발레가 딸려 있다.

 

그리고 이들 음악에는 한 곡마다 번호가 붙어 있고 그것은 극의 줄거리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되고 연주되어 간다. 이 얼마나 즐겁고 규모 큰 음악회인가.


오페라는 원래 이처럼 연극을 본다기 보다는 음악을 듣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므로, 극의 대본은 별로 잘되어 있지 않더리도 훌륭한 음악으로 이것을 살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반대로 모처럼 좋은 대본을 가졌었으면서도 그 음악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히 묻혀 버린 작품도 있다. 즉 음악이 좋지 않으면 연극으로서 아무리 재미가 있더라도 오페라로서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오페라에서는 가수가 우수해야 하고 합창이나 관현악이 훌륭해야 하며 숙달된 지휘자와 연출자의 기량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오페라는 '본다'고 하기 보다는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페라는 어쨌든 연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장치와 조명, 의상 등의 무대미술이나 특히 인물의 연기가 서툴러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역시 훌륭한 음악에 조화가 되지 않는 빈약한 장치나 이야기의 줄거리와 모순되는 서툰 연기로는 아무리 노래가 능란해도 별로 좋은 오페라라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페라는 음악의 가장 넓은 의미의 연주로서 참으로 어렵고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만큼 가수에게 있어서나 관현악단과 지휘자, 연출자에 있어서도 일하는 보람이 있으며, 이토록 화려한 음악은 달리 없다는 것이 된다.


보통의 오페라, 즉 정가극(오페라 세리아)을 그랜드 오페라라고도 하는데 대사는 없고 그 대신에 레치타티보(서창)를 사용한다. 이것은 단순한 대사에 조금 가락이 붙은 듯한 것으로서, 반주도 극히 간단한 화음만을 군데군데 붙인다. 

 

레치타티보에 간단한 화음만을 곁들인 것(옛날에는 이 부분을 관현악이 쉬고 하프시코드나 피아노만으로 연주했음)을 레치타티보 세코(건조 서창 즉 단순한 서창)라고 하며, 관현악의 연주로 극적인 분위기를 그리면서 부르는 것을 레치타티보 아콤파니야토(반주 붙은 서창)라고 한다. 전자의 간단한 레치타티보는 근대의 오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독일의 오페라에서는 19세기 초까지 레치타티보를 사용하지 않고 보통의 대사로 된 회화를 삽입한 것도 있었다. 예컨데 모짜르트의 "마적", 베토벤의 "피델리오", 베버의 "사탄의 마수"등은 모두 가사가 들어 있다. 

 

이것은 옛날에 독일에서 징시피일(노래연극) 이라는 것이 행해져 대사와 노래를 지닌 극이 대중에게 환영받았던 습관을 도입한 것으로서, 그 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양식이 전성해짐에 따라 이 습관도 차츰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레치타티보는 아름다운 노래와 노래 사이를 연결하여 줄거리를 알기 쉽게 끌고 가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해 가수가 그의 장기를 보여줄 수 있는 노래를 '아리아'(영창)라고 한다. 

 

아리아가 되면 작곡자는 가수의 전능력을 발휘시킬 만한 아름답고 화려한 노래를 대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오페라의 아리아는 대체로 어려운 것이 많고, 그만큼 뛰어난 가수에 있어서는 노래할 보람이 있는 명곡이 많은 셈이다.


유명한 아리아가 끝나면 청중은 기뻐하며 그 가수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한 때의 가수도 그 박수에 응해 극의 진행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 앞에 나와 손님에게 인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현악에 신호하여 처음부터 다시 한번 그 아리아를 불러서 들려주는 일조차 있었다. 극을 관람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되는 셈이지만, 이것도 오페라가 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음악회라고 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창도 오페라 속에서는 중요하며 유명한 2중창이나 3중창, 4중창 등의 아름다움과 재미는 오페라 애호가에겐 정말 더없이 즐거운 것인데, 어쨌든 두 사람 내지는 3명, 4명이 각각 다른 가사로 다른 선율을 따로따로 부르기 때문에 음악적인 재미는 있어도 가사를 전부를 알아듣지 못해 몹시 무리한 줄거리가 되는 수도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렛토"의 제3막에 유명한 4중창(콰르텟)이 있다. 이것은 4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따로따로의 가사를 함께 부르고 있다고 하는, 음악적인 복잡한 재미가 베르디의 노련하고 교묘한 작곡 기교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지금 그 무대를 구경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무대 오른쪽에 막달레나라는 여자의 집이 있고 방의 내부가 보이도록 되어 있다.

 

밤중에 그 방에는 불이 켜져 있다. 그곳에 만토바 공작이 서 있다. 여자를 좋아하는 이 귀족은 지금까지 남달리 귀엽게 여겨 사랑했던 질다라는 순진한 처녀를 버리고, 이번에는 이 막달레나를 열심히 유혹하고 있다. 

 

"아름다운 여자여, 그대의 상냥한 말을 한 마디만 해 주오."하고 테너 특유의 감미로움과 밝음을 십분 발휘해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유명한 '리골렛토의 4중창'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 막달레나는 실은 어떤 살인청부업자의 누이동생인데 "그런 달콤한 말을 해도 그 수단에 넘어가지 않아요"하고 얼버무리면서 이 돈환 같은 공작을 속여 주려 하고 있다. 이것은 알토의 목소리로 매우 요염하지만, 감미로운 테너와 조화되어 명랑한 2중창이 된다.


동시에 무대의 왼쪽 어두운 옥외에서는 이 공작에게 버림받은 질다(소프라노)가 신세 한탄을 하며 슬퍼하고 있는 것을 그의 부친 리골렛토(바리톤)가 조용하게 위로하면서 그 분노의 마음에 복수를 맹세하는 2중창이 이에 얽히고, 동시에 진행하는 두 쌍의 2중창이 합류하면 청중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4중창으로 들리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오페라의 정말 즐겁고 재미나는 곳이며 작곡자의 솜씨를 보여 주는 곳이지만, 거기에 더해 4명의 뛰어난 가수들의 아름다운 음악상의 기술이 모두 일체가 되어 오페라를 좋아하는 구경꾼을 감탄시키고야 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줄거리와 등장 인물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이며, 만약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처음으로 이 4중창을 들은 사람에게는 네 사람이 따로따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도저히 구분해서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야기의 내용과 줄거리를 미리 읽고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각 장면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면 알수록 무대를 보았을 때의 흥미는 깊어진다. 

 

이 장면에서는 어떤 춤의 곡이 있다든가 다음에는 어떤 아름다운 노래가 불려지는가 하는 것, 즉 '핵심'과 같은 것을 알고 있으면 그만큼 재미 있는 셈이다.

 

또 가수나 그 밖의 출연자에 대해서도 예컨데 저 아리아를 이 가수는 어떤 식으로 부를까, 저 곳의 어려운 3중창을 이 사람들은 얼마나 능란하게 다룰까 하는 식으로 들으면 오페라는 음악회와 똑같은 점에서 흥미가 고조되게 되는 것이다.


오페라의 가사는 최근에는 각국이 모두 원어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작곡자가 그것을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말대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약 20년 전에는 각각 사용하는 나라의 말로 번역해서 부르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한국인 가수로 상연하는 경우에는 현재도 대개는 한국어 가사를 사용한다. 이것은 얼마간이라도 청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하려는 것인데, 앞의 '예술가곡'의 곡에서도 말했듯이 노래는 음악적인 울림으로 보더라도 원래의 가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원작과 다른 말로 부르는 것은 예술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점과, 또 들어서 처음으로 그 노래의 의미를 안다기보다는 오페라는 처음부터 줄거리 정도는 안 다음에 이것을 듣는다는 식으로 되어 왔기 때문에 설령 개개의 말의 의미는 모르더라도 노래로서, 보다 아름답게 불려지는 데 중점을 두고 감상한다면 오히려 원어로 부르는 편이 좋다는 사고방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특히 미국처럼 유럽 각국에서 뛰어난 가수가 많이 모여드는 나라에서는 하나의 무대에서 각각 다른 나라의 가수가 자국어로 다른 가사를 동시에 부르는 일도 있다. 

 

생각해 보면 무척 이상한 이야기인데, 원래 오페라의 청중은 단지 능란한 노래에 도취해서 즐거워하고 있으면 좋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각각 조화가 안 잡힌 가사로 부르는 것을 들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은 극보다는 음악 쪽에 중점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처럼 오페라는 너무 지나치게 음악을 중심으로 해서 발달해 왔기 때문에 극 쪽은 언제나 소홀해지기 쉽다.

 

가령 어떤 오페라가 문학적 가치와 연극적인 구성력이나 정신적인 높이가 부족하더라도, 그 음악만 훌륭하게 작곡되어 연주되면 구경꾼은 까닭도 없이 즐거워하고 있다. 

 

문학으로서는 전혀 깊은 맛이 결여되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음악때문에 오페라로서 성공한 것도 많다. 오페라는
종합예술로서는 너무 지나치게 음악회의 기분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시대와 함께 점점 감상자가 만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근대의 오페라는 어느 것이나 연극적인 효과를 강화하도록 연구하게 되었다.


오페라가 정말로 음악과 연극의 종합예술이라면 좀더 문학적으로 높은 것, 연극으로서도 충분히 완성된 형태를 지닌 것이 음악과 함께 만들어지고, 이것이 무대예술의 효과와 일치해서 상연된다면 어떨까.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19세기 후반, 이른바 '오페라 개혁'의 커다란 이상을 내건 바그너이다. 바그너는 완전한 희곡을 소재로 해서 음악을 그 표현 수단으로 진행하는 참된 의미의 종합 예술이 이런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여 여기에 새로 '악극'을 창시하였다. 

 

그가 이 커다란 일에 손을 댄 것은 꼭 지금부터 백년 전쯤의 일이었는데, 바그너도 처음부터 아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리엔찌", "로엥그린"등, 모두 종래와 같이 오페라로서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로엥그린"은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동시에 사실상 최고의 '악극(무지크 드라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


바그너는 이 이상을 그의 작품 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냈을까. 먼저 그는 종래의 '서곡'(이것은 오페라 속의 화려한 선율을 접속해서 만든 것)을 없애고 그 대신에 전주곡(프렐류드)을 두기로 하였다. 

 

이로써 그 음악은 단순한 개막의 기분을 떠들썩하게 하는 음악이 아니고, 희곡의 내용을 암시하여 청중의 마음을 어느 사이엔가 극의 진행에 끌어 들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그 전주곡의 첫 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막은 아직 내려져
있다라도 이미 극은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바그너는 라이트 모티브(지도동기) 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희곡 속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물건, 혹은 관념, 감정 등이 극의 줄거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을 하나하나 개성적인 짧은 가락으로 각각 나타낸다. 

 

예컨데 지크프리트의 모티프라든가, 검의 모티프, 가락지의 모티프, 연애의 모티프, 죽음의 모티프라는 식으로 각각 정해진 많은 짧은 선율을 만들어 두고 그러한 것들이 극의 진행과 함께 여러 가지로 활동하거나 편성되기도 해서 음악적으로 발전하여, 음악으로 극을 구성해 가는 것이다.


또 바그너는 1막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희곡적 구성 아래 음악은 극의 발전을 중단시키는 일 없이 이끌어가도록 만들었다. 거기서 불려지는 노래만 하더라도 종래의 오페라처럼 레치타티보니 아리아니 하는 구별은 없어지고, 노래도 관현악도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극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어 작용한다. 

 

바그너는 이 수법을 '무한선율'(단락이 없는 음악)이라 부르고 있다. 종래의 오페라는 구경꾼이 기뻐할 것 같은 화려한 아리아와 중창이나 합창도, 극으로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용치 않는다. 

 

또 오페라에는 거의 대부분이 발레 장면을 삽입했었는데 바그너는 거의 이것을 넣지 않는다.  그 대신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교향시라도 듣고 있는 것처럼 음악을 멋진 연극과 함께 진행해 갔다.


바그너는 종래의 오페라에 대해서 이것을 악극(무지크 드라마)이라고 하였다. 악극은 바그너의 극히 높은 예술의 이상과 음악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태어난 새롭게 창조된 형식의 무대예술이다. 

 

이것은 종래의 오페라를 개량했다든가, 그 미비한 점을 보충했다든가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고, 오페라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바그너 이후, 오페라와 악극이 양립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래의 오페라에는 오페라로서의 즐거움이 있다. 그 모순도, 어리석음도, 오페라 애호가에게는 다시 없는 매력인 것이다. 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악극은 아무래도 긴장의 연속으로서 답답하고 이론적이며, 때로는 지루한 것인지도 모른다. 

 

악극에도 또한 발전해야 할 점이 많이 있다. 바그너가 오페라 개혁을 뜻하고 악극을 창시했다고 해서 장래의 것이 모두
악극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악극이 전세계의 근대 오페라에 헤아릴 수 없는 지대한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전화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