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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24 한국팝의 사건사고 - 22. 팝 혁명의 막후 지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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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22. 팝 혁명의 막후 지원자들

 


1970년을 전후해, 포크, ‘소울 & 사이키’ 같은 이른바 팝 계열 음악이 대중음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데에는 그 주역인 음악인들 뿐 아니라 막후 지원자들의 역할도 컸다. 

 

‘히 식스’와 ‘쥰 시스터스’ 등을 후원한 조용호, ‘키 보이스’와 ‘트리퍼스’ 등을 지원한 이종환, ‘뚜아 에 무아’의 후견인이었던 이해성, 특정 가수를 거명할 필요 없을 ‘한국 포크의 담임선생님’ 이백천, 그리고 이성애와 이석 등을 후원한 김정호 등이 그들이다. 대부분 시대를 풍미한 방송인들이다.

 

그런데 팝 계열 음악의 후원자 가운데 ‘너무나 중요하지만 망각된’존재로 서병후라는 이름이 마땅히 호명되어야 할 것이다. 

 

(» 팝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 서병후  )

 

서병후는 팝 음악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967년 최초의 팝 음악 잡지이자 문화 잡지인 <팝스 코리아나>를 창간하고 이후 <주간경향>, <주간중앙> 등의 기자로, 팝 컬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한국에서 대중음악 평론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일간신문에서는 가수나 가요에 관한 이야기를 저질로 여겨 기사로 다루지 않던 시절이었다.

 

‘펄 시스터스’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음악을 빚어낸 신중현을 발굴해 처음 대중적으로 알린 것도 그였고, 당시 신중현 사단이라 불린 김추자, 박인수 등은 물론 많은 그룹 사운드를 가장 왕성하게 소개한 것도 그였다.

 

무엇보다 서병후는 필력을 날리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몸을 날려 각종 리사이틀과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의 기획자이자 프로모터로 활약했다.

 

고고 클럽의 탄생에도 산파 역할을 했고 이런 무대에 무명의 가수와 그룹 사운드가 설 수 있도록 매개가 되는 데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활약한 음악인들로부터 그의 조언과 도움을 고마워하는 증언을 지금도 종종 들을 수 있다.

 

하지만 1960-70년대 ‘팝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대중음악계에 그가 남긴 성과는 휘발되고 지금은 그저 힙합 그룹 드렁큰 타이거의 리더 ‘타이거 JK(서정권)의 아버지’란 설명을 앞세워야 이해하기 쉬운 상황이다. 이게 현단계 한국 대중음악계의 ‘슬프지만 진실’일 테지만.

또 한 명 언급해야 하는 이름은 박영걸이다. 그는 뒤에 ‘신중현과 엽전들’의 매니저를 맡기도 했고 1970년대 중반 음반 및 매니지먼트 전반을 관장한 노만기획을 설립하여 이은하, 정난이, 벗님들 등을 거느렸던 한국 매니지먼트계의 ‘큰 형님’ 격인 인물이다.

 

박영걸이 가요계의 수면 위로 처음 올라온 것은 1970년의 일이다. 그해 열린 제2회 보컬 그룹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라스트 찬스’, 구성상을 받은 ‘데블스’가 그의 사단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룹이었고 그 결과 그 자신은 지도상을 수상했다.

 

훗날 ‘안녕’ 등으로 인기를 얻은 김태화가 재적했던 ‘라스트 찬스’가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발광’의 무대를 선사하고, 보컬 연석원이 가수왕상을 수상하기도 한 소울 그룹 ‘데블스’가 해골 복장에 여성 주검이 들어있는 관을 설정해 연출했던 일은 지금도 센세이션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른 맥락이지만, ‘데블스’와 ‘라스트 찬스’는 ‘엘리트 코스’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고생을 거듭하다 중앙무대로 성공적으로 올라온 경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신중현이나 김홍탁의 그룹처럼 미8군 무대의 최고의 자리에 이어 일반무대에서도 지식인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게 아니라, 왜관, 파주 등지의 지방 기지촌에서 밴드 생활을 전전하며 한겨울 ‘빤스 바람’ 기합에 더러 ‘빳따’도 불사하는 전설 같은 강훈을 거쳤다는 얘기다.

 

이제까지 언급한 후견인들은 방송, 잡지, 공연 등을 통해 대부분 순진하리 만치 사심 없이 팝 계열 음악인들을 도와 팝 혁명에 조력한 인물들이다.

 

현재의 이수만, 양현석, 박진영 같은 거물들처럼 기업형 종합매니지먼트를 꾸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의 일이다. 하지만 이후 기획사를 차려 성공한 박영걸의 경우처럼 그 맹아를 보여준 측면은 있다. 그래도 그 시절 후견인들은 음악인들에게 ‘사장님’이나 ‘선생님’이 아니라, ‘맏형’ 같은 존재였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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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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