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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10 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1. 음악의 양식 3편. 현대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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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1. 음악의 양식 3편. 현대의 음악

 

 

3) 현대의 음악

낭만파의 어떤 부분은 이처럼 너무도 현실을 벗어난 공상에 빠지거나 주관적인 영웅주의에 흘러 음악의 본질을 잃으려고 해서, 차츰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가게 되었다.

 

청중은 좀더 직접, 감각에 호소하는 그런 음악을 구하고 있다. 머리로 생각하는 음악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음악을 요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상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수법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 화려했던 낭만파의 음악을 갑자기 잊어버릴 수 없는 청중도 많이 있다. 또한 낭만파의 대가들이 남긴 가지각색의 뛰어난 수법은 이것을 좀더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다. 

 

예컨데 19세기 말까지 배양되었던 대규모의 관현악법이나, 많은 독주 악기의 고도된 연주 기술 등은 그대로 연장하여 진보케 하고 다시 그 특색을 살려 간다면 현대인의 감각에도 충분히 환영받는 요소가 된다.


또 슈만이나 쇼팽과 같은 낭만파의 대가가 장기로 했던, 순간적인 시적기분을 포착하여 이것을 음악으로 나타내어 가는 간결한 작곡의 목표에 대해 수법의 차이는 있을 망정 그 사고방식은 드뷔시, 무소르그스키등의 인상주의로 계승되어 갔다.

 

다만 인상주의의 음악과 인간의 인상과의 사이에 문학적인 것의 사고방식을 넣지 않고 직접, 감각적으로 하나의 기분을 구성하는 것이다.

 

드뷔시의 음악은 옆으로 흐르는 선이 아니고, 즉 멜로디를 으뜸으로 한 것이 아니고, 세로로 겹친 음이 빚어내는 색채와 명암의 감각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시적인, 혹은 회화적인 기분을 만들어 내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작곡자와 또 동시에 청중의 심정의 참된 모습이 추구된다.

 

이런 관점에서 드뷔시의 음악을 '수직주의'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즉 멜로디가 으뜸이 아니고 새로로 겹친 음의 하모니로 구성되어 가는 음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드뷔시의 음악에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지닌 작품이 많이 있지만, 그보다는 음의 감각적인 취급을 좀더 소중히 했다는 것이리라. 그것은 확실히, 작곡자의 현실과 동떨어진 제멋대로의 공상의 세계는 아니고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음악이다.


드뷔시는 파리에서 많은 인상파의 화가나 시인과 교제하여 이 새로운 영향을 받았다고 일컬어지지만, 또한 당시의 자연주의 문학도 음악의 사고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음악의 이 새로운 경항은 많은 작곡자들을 공명케 하였다.

 

 

음악은 지금까지처럼 명확한 관념이나 희로애락의 감정을 그리려고 노력하는 강한 '선'의 흐름에서, 좀더 막연한 기분을 나타내는 색채나 음영의 느낌으로 옮겨 갔다.

 

따라서 지금까지처럼, 선을 다루는 갖가지 법칙, 즉 조성이라든가 음계의 형이라든가 하는 것은 좀더 자유로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선과 선을 짜맞추는 기술이나 법칙, 대위법과 같은 것에 대한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주기적인 리듬을 나타내는 박자 관념도 가로의 선이 풀어놓여지고 보면 거기에 옹색한 약속은 아무 것도 없게 되고 만다. 가지각색의 신선한 색채를 새로운 팔레트 위에서 뒤섞어 보면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아름다운 빛깔도 만들어져서, 이미 수백년래의 낡은 화성법 등은 거의 그 원칙을 나타내는 일 밖에는 소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상주의의 작곡가들은 색채감이 풍부한 전혀 새로운 화성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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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독일에서는 쇤베르크 등에 의해 새로 표현주의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표현주의는 드뷔시 등의 인상주의와는 반대로 멜로디의 '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낭만파처럼 감미롭고 도취적인 멜로디를 쫓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많은 선이 전혀 새로운 감각을 지닌 대위법적인 수법에 의해 동시에 진행하면서 색채감이나, 그림자와 빛의 느낌을 만들어내어 가는 것이다. 물론 옛날의 엄격한 법칙을 지닌 대위법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선이 주체가 되면 박자도 중요한 것이 되는 셈인데, 이것도 획일적인 리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몇개의 박자를 동시에 짜 맞추어 거기서 복잡한 어떤 감각을 구하기도 한다.


또 이 새로운 대위적 수법은 멜로디의 '조'를 가장 자유로운 입장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때는 무조가 되고 어느 때는 다조, 즉 많은 다른 조가 동시에 짜 맞춰지고, 또 거기서도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냈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는 그 표현법에 대한 생각은 이처럼 전혀 다르지만, 결국 그 목적으로 하는 바는 음악 그 자체에서 아름다운 감각과 감정의 표현을 구하므로 19세기의 낭만주의에서 한 발짝 나아간 것임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수법이나 취향을 완전히 버렸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결과에 있어서, 수백년에 걸쳐 음악사상이 걸어 온  갖가지 양식이 많건 적건 모든 시대의 예술양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영향을 주고 축척되어 왔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시 가까운 현대음악에 대해서 본다면, 어쨌든 인간의 사고방식이 한없이 자유로와지고, 그 수법도 여러 가지 편리한 악기나 기계의 힘을 빌 수가 있기 때문에 갖가지 잡다한 양식의 것이 나온다.

 

형식은 점점 자유로와지고 조성, 박자, 화성 등의 관념도 이미 옛날의 것과는 전혀 다른데, 그러한 것들 중에는 새로운 고전주의도 있는가 하면 새로운 낭만주의도 있다고 하는 셈이다.

 

또 20세기의 미국의 흑인 간에 생긴 재즈음악의 수법이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음악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뭔가 새로운 시대의 정신 생활, 사회 생활에 적합한 감각을 추구하고 청신한 기분을 내려 힘쓰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  

 

현대음악은 종종 감상자를 당황케 하는 수가 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맛보기 전에, 먼저 그 너무도 새로운 색다른 수법에 갈피를 못 잡는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고전파나 낭만파의 음악에 길들여진 귀를 깜짝 놀라게 하는 듯한 '틀에 박히지 않은' 수법이 많기 때문이다. 옛 음악으로 부터는 명확히 포착할수 있었던 관념이나 감정을 똑같이 새로운 음악에서도 구하려고 하면 참으로 사정이 달라졌다고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쨌든 20세기에 태어나 현대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이다. 귀에 익지 않았더라도 역시 현대의 음악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아름답고 슈베르트의 가곡이 정말 감동을 준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더라도, 지금의 작곡자가 베토벤과 비슷한 교향곡을 만들고 슈베르트를 꼭 닮은 가곡을 써 준다고 하면, 그것은 현대의 청중의 마음으로부터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시 현대의 작곡자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의 작품이 반드시 현대인의 감정을 높이는 요소를 어느 시대의 작품보다도 많이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4) 전자음악과 뮈지크 콩크레트

근년에 전자과학의 눈부신 진보와 함께 전혀 새로운 음악의 양식이 생겨났다. 그것은 뮈지크 콩크레트와 전자음악이다. 이미 이러한 것들의 음악회도 있었고 발레와 그 밖의 실용에도 제공되고 있으니까 간단하게나마 그것을 설명해 두기로 하자.

 


1. 뮈지크 콩크레트

1950년 경 파리 국립방송국의 음악감독이었던 피에르 세페르(Pierre Schaeffer 1910- )가 창시한 것이다. 종래의 음악은 그 재료로서 인간의 목소리든가, 혹은 음악의 소리든가, 또는 그 양쪽을 합해서 사용하였다.

 

극히 드물게, 예컨데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속에서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녹음헤서 사용했다거나, 리햐르트 시트라우스의 "돈 키호테" 그 밖의 곡에서 윈드 머신(연극 때 바람소리를 만드는 도구) 등 악기가 아닌 것의 음도 쓰여진 예가 있지만, 우선 거의 모든 음악은 성악과 기악만을 그 재료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페르의 사고방식은, 음악이 인간의 청각을 통한 예술인 이상, 어쨌든 귀에 들리는 음은 무엇이건 음악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바람소리며 비 소리, 폭풍, 파도소리, 화산의 굉음과 같은 자연계의 여러 가지 음향은 물론이고 벌레 소리, 새의 울음소리, 짐승과 그밖에 일체의 돌물이 내는 소리도 사용한다.

 

또 군중의 웅성거림, 각종 작업의 잡음, 기계의 울림에서 자동차, 항공기의 엔진소리와, 그밖에 총포, 다이너마이트처럼 큰 음에서 컵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물 속의 물고기 소리를 마이크로 모은 음처럼 미약한 음에 이르기까지 무릇 인간의 귀에 들리는 일체의 음향이 음악의 재료가 된다.

 

그러한 현실음을 사용 한다는 데서 뮈지크 콩크레트를 '구상음악' 이라든가 '구체음악'이니 하고 직역한 적도 있지만, 참된 목적은 아직 다른 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성악이나 기악도 참가한다.


이런 무수한 종류의 음 속에서 작곡자는 그 작품에 필요한 것을 택하여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수도 있으며, 혹은 전기적으로 변형해서 사용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많은 종류의 음을 녹음하여 모아 두는 라이브러리가 필요해진다. 실제 문제로서 음악회 때에 동물이 언제나 알맞게 울어 준다고는 할 수 없다. 또 좀더 규모가 큰 기계 따위를 회장에 들여 놓을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녹음 테이프에 수록해 두는 것이다.


지금 가령 비 소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작곡자는 반드시 이것을 바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음향으로서 이것을 적당한 높이, 셈여림, 음색 등으로 가공하여 하나의 악기처럼 생각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이미 '비'라는 관념이나 연상은 없어지고 만다. 모든 음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셈이니까 가령 사자의 소리가 들리더라도 청중은 곧 아프리카의 정글 등을 상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통의 오케스트라에서 트롬본의 솔로가 나왔구나 하는 정도로 듣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음이 전기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종래에 도저히 인간의 솜씨로는 할 수 없었던 그런 일도 가능해진다. 예컨데 트럼펫의 명인에게 있어서 1초 동안에 1옥타브의 음계가 고작이었다 하더라도 전기적으로 처리하면 이것을 2분의 1초로도, 5분의 1초로도 줄일 수가 있다.

 

또 대형 피아노로 8옥타브 정도가 고작이었다 해도, 진기적으로 다루어 그 음역을 2배로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테이프의 속도를 변화시킨다거나 음의 필터를 사용하기도 해서 모든 음의 음색을 바꿀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의 귀에 들리는 무수한 음의 종류를 사용하고 더우기 이것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킴으로써 작곡에 사용하는 음의 종류는 몇 만배나 되며, 따라서 이것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의 표현능력에 무한한 가능성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뮈지크 콩크레트에도 여러 가지 길점이 있다. 우선 매우 풍부한, 현실음의 라이브러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긴 세월을 필요로 하며, 만약 작곡자가 요구하는 현실음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 역시 상당한 수고를 하고 어디선가 만들어 와야 한다. 

 

또 가령 작곡에 필요한 현실음이 전부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각각 전기적으로 처리하기도 하고, 합성하거나 편집하기도 하고 많은 인원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너무 오랫 동안 많은 품을 들이고 있노라면 맨 처음 작곡자의 머리에 떠오른 음악의 이미지가 상실되거나 바뀌고 마는 일조차 있다.

 

이론으로서는 재미있는 착상인 뮈지크 콩크레크도 최근에는 별로 제작되지 않고, 작곡가는 오히려 그 다음에 나타난 전자음악 쪽에 많은 흥미와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뮈지크 콩크레트는 또 적당한 역어가 없기 때문에 보통은 원어로 부르고 있다.

 

 


2. 전자음악, 신디사이저

이것은 앞에 말한 뮈지크 콩크레트보다 조금 뒤늦게 시도된 것이지만, 전자공학의 놀라운 진전으로 지금은 이 쪽에서 더많은 연구와 그 성과를 볼 수 있다.


뮈지크 콩크레트가 인간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면 자연계의 음이건 인위적인 음이건 모두 이것을 음악의 재료로서 사용하겠다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전자음악은 이 생각과 전혀 반대의 입장에서 나오고 있다.


즉, 인간의 목소리도 악기의 음도 사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연계의 음이나 그 밖에 기성의 음은 일체 그 재료로 하지 않고, 처음부터 모든 음을 새로 만들어 가겠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자면 먼저 '순음'을 만든다. 순음이란 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아주 순수한 음을 말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전기적으로 만드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피아노도, 플루트도, 오르간도, 언뜻 생각하면 상당히 순수한 음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재각기 많은 배음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기에 각각 '음색'이라는 것을 갖고 있으며 피아노, 플루트, 오르간이라고 곧 그 음색에 의해 구분해서 들을 수 있는 셈인데, 만약 이들 악기가 순음이었다면 이것을 음색으로 판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높이의 순음을 만들고, 이번에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합성한다. 그러면 거기에 여러 가지 음색이 생긴다. 그 종류는 몇천만, 몇억이라고 할 만큼 거의 한 없이 많고, 물론 기재의 악기의 음색도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우리들이 아직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그런 진기한 음색이 얼마든지 가능한 셈이다. 

 

이것은 모두 치밀한 수학적 계산과, 이것을 전자공학에 응용함으로써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극히 정밀하고 게다가 대규모의 기계나 장치를 필요로 한다.


음색만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이 음악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곡가는 음의 강약은 물론이고 자유로운 리듬, 음의 감쇠, 혹은 증강의 자유자재로운 변화, 고저의 여러 가지 변화를 이것도 역시 전기적인 처리에 의해 합성해서 만들고, 작곡가가 생각하는 대로의 음악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전자음악의 악보는 처음 보아서는 전혀 알수 없을 만큼 복잡한 것으로서, 악보와 많은 숫자와 정밀기계의 설계도와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 데, 이것도 아직 현재로서는 각 작곡가가 자기가 사용하기 쉽도록 멋대로 고안해서 적고 있는 것 같다.


전자음악은 연주가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두 전기적으로 음이 만들어지고 컴퓨터에 의해 계산되고, 기억되고, 합성되어, 이것이 음악으로서의 목적을 위해 처리되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은 테이프와 그 밖의 수단으로 녹음되고, 이것이 또 전기적으로 재생된 것을 감상한다고 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작곡가는 자기자신 혹은 전자기술자와 협력하여, 최초의 기획, 작곡에서부터 마지막에 이것이 음이 되어 청중이 들을 때까지의 책임을 지게 되는 셈이다.


이 작업을 하는 '악기'로는, 얼마간 쓰기 쉬운 형과 장치를 지닌 것을 신디사이저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래의 피아노나 파이프 오르간처럼 완성된 악기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 까다로운 작품이 되면 몇대의 신디사이저를 동시에 사용하거나, 혹은 몇번 녹음을 거듭하기도 해서 작곡하는 일이 많다.


사고방식으로서는, 앞에 말한 모든 현실음을 사용하는 뮈지크 콩크레트보다 더욱 합리적이고 장래의 발전성도 있지만, 아무튼 기계장치에 많은 경비가 들기 때문에 선뜻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전자공학은 일진 월보의 빠른 개발에 의해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없을 만큼 진보해 간다. 그러면 1년 전의 작품은 이미 낡았고, 5년 전의 작품은 유치해서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과학적으로 보거나 작곡의 기법상으로 보거나, 전자음악은 커다란 장래의 희망을 가지면서, 현재는 아직 개발도상의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장차 그 속에서 불후의 걸작, 천하의 명곡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현재 유능한 작곡가들이 여러 가지 실험과 창작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 현상이다.


이상과 같이 최근의 전혀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극히 간단하게 소개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종래의 음악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

 

6세기경에 생겼다고 하는 최초의 기보법인 네우마에서 개량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음악은 악보를 갖고 있다. 이것은 일단 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주자가 임의로 판단해야 하는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가령 A와 B의 두 피아니스트가 같은 악보를 사용해서 연주했다 하더라도 그 2개의 연주를 비교해 보면 반드시 어딘가에 차이가 있다. 

 

연주가 각자의 해석, 감각, 취미의 차이, 즉 개성이 자연히 혹은 인위적으로 세밀한 부분에서 연주의 차이가 되어 나타난다. 같은 오케스트라로 같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해도 지휘자가 다르면 거기서 나오는 음악에 큰 차이가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점이 종래의 음악적인 표현에 있어서 재미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하나의 표준적인 연주가 가장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을 레코드라든가 테이프로 들어야만 한다면 이렇게 시시한 일은 없다.

 

쇼팽의 피아노곡도, 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개성을 듣고 이해할 수가 있기에 음악은 즐거운 것이다. 전자음악과 같은 전혀 새로운 음악은 그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음악에도 이를 대신하는 즐거움이 장래에는 생길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인간이 만드는 예술이 인간성을 부정하지 않도록 미래의 음악에 대해서도 바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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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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