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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09 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1. 음악의 양식, 2편. 근대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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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1. 음악의 양식

2편. 근대의 음악

 

 


(4) 근대의 음악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발달한 단선율 음악에의 취향은 이윽고 베니스와 나폴리로 전해졌고 얼마 후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하나는 화려한 오페라의 아리아로 발전하고 하나는 밝고 즐거운 기악의 전성으로 이끌어 갔다.


베니스의 산 마르코 사원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음악학교의 교장도 겸하고 있었던 비발디는 이 새로운 경향을 한층 풍부한 것으로 하여 바이올린 음악과 합주협주곡을 대성시켰으며, 독일의 바하나 헨델에게 이탈리아 음악의 새로운 시대의 양식에 대한 많은 시사를 주었다.


이 밝고 풍부한 이탈리아 음악은 새로운 독일의 음악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남독일의 만하임의 뛰어난 음악가 요한 시타미쯔, 안톤 필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만하임 악파의 융성을 초래하였다. 

 

그 무렵 만하임의 궁정에는 40명으로 구성된 당시의 유럽에서 제일이라고 일컬어졌던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시타미쯔는 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으므로 관현악의 연주에 대해 많은 기술을 체험하였으며 이것을 새로운 작곡의 수법으로 도입하였다.

 

예컨데 강약의 변화에 의한 가지각색의 표현은 이 악단의 가장 뛰어난 연주 기술의 하나였는데, 이것은 곧 작곡상의 중요한 수법으로서 섬세한 감정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작품도 내놓았다.


만하임 악파는 또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의 형식을 아주 새롭게 해서 이들 악곡의 제 1악장이 되는 '소나타 형식'이라는 훌륭한 형태를 완성하였다. 이 악파를 고비로 하여, 비발디 이전의 이른바 바로크 양식의 소나타나 협주곡, 그리고 근대의 소나타, 협주곡의 양식을 판이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이 완성된 양식은 현대의 음악으로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서 '근대'라 부르고 있는 것은 20세기부터의 이른바 근대 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좀더 넓은 의미의 18세기 중반부터를 말한다.

 

그것은 악곡의 형식을 비롯해서 관현악을 편성하는 원리, 기악 연주의 기술등이 근대, 현대로 직접 이어서 발전해 온 요소가 이 시대에 대충 형성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근대라고 함은 넓은 의미의 근대음악을  말하는 것이다.


만하임 악파는 대바하의 아들들 몇사람을 비롯, 많은 음악가가 이에 참가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도 그 음악의 양식으로 본다면 모두 직접, 간접으로 이 만하임 악파를 이어받은 것이다.

 

 


#1 고전파

만하임 악파에서 나온 사람들과, 그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을 고전파라고 한다. 대바하의 아들들, 장남 프리데만을 비롯해서 에마누엘, 크리스티안 등, 또 디터스도르프, 복케리니, 그리고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도 또한 고전파의 작곡가이다. 특히 이 세사람은 빈을 중심으로 해서 활동했기 때문에 빈 고전파라고 말하는 수도 있다.


당시의 예술적 음악은 교회가 아니면 왕후 귀족의 저택 내에서 연주되는 일이 많았다. 고전파 작곡가들의 직장은 이들 귀족 사회였다.

 

직접 귀족 등에게 고용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러한 기분의 음악이 그 시대의 음악의 양식이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그 음악은 항상 밝고 명랑하며 우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곡자의 너무 강렬한 개성은 환영받지 못한다.

 

누가 어떤 기분일 때에 듣거나 항상 즐겁고 아름다와야 하기 때문이다. 힘찬 정열이나 비창한 느낌 등도 우선 당시의 화려한 살롱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도 안된다.

 

이것을 듣는 손님은 아름다운 사교복으로 몸을 장식하고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더러는 졸기도 하는데, 그 동안에 실내악 등이 연주된다. 만약 그 졸음을 깨우는 듯한 강렬한 외침이 나온다거나, 우울한 감정을 일으키는 종류의 것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걸작이라도 낙제이다.  

 

베토벤이 젊었을 때 작품 1번으로서 세 곡의 피아노 3중주곡을 썼다. 그 첫째와 둘째는 과연 우아한 당시의 궁정 양식의 음악이지만, 세째인 c단조의 곡은 가장 개성적이고 비극적인 느낌을 지닌 것이다.

 

그러자 그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이 그 세번째 곡만은 함께 출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음에도, 베토벤은 이 비평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그것을 무릅쓰고 출판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고전파의 음악은 유형적인 것이 되기 쉽다. 

 

오늘날까지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장식하고 있는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명곡은 과연 대천재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 유형적인 무수한 악곡 속에 있어도 역시 후세에 남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얼마나 비슷한 느낌의 곡이 많은가.


하이든의 백곡을 넘는 교향곡과 80곡에 달하는 현악 4중주곡만 하더라도 지금 연주회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그 가운데 아주 일부의 작품에 한정되어 있다.

 

모짜르트의 아름다운 피아노 3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 평소 연주회에 나오는 것은 그 많은 것중의 몇곡일까.

 

이러한 대작곡가의 작품도 그런 형편이니까, 다른 고전파의 많은 작곡가들이 남긴 몇백, 몇천개의 음악이 어느 것이나 아름답고 즐겁고 온화한 작품이긴 할테지만 매우 유형적인 것 뿐이어서, 오늘날에 와서 보면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대표적인 곡에 의해 전부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음악, 고전파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처럼 혁신적이고 독창적이며 게다가 솜씨 좋은 작곡가가 이런 유형의 테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고전주의 속에 자라 그 9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의 근본은 고전주의의 형식, 내용 아래 창작하면서도, 다음에 오는 낭만파시대의 화려하게 번영했던 백년간의 싹을 이미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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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낭만파

베토벤의 일대 동안에 유럽 천지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사상의 발흥과 봉건제도의 붕괴가 각국의 정치 위에 크게 실현되어온 일이었다. 귀족이나 대지주의 폭정에 이미 민중은 견딜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루소와 볼테르, 또 영국의 기번 등이 자유를 부르짖고 전 유럽 사람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독일에서 일어난 낭만문학의 유행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구하는 용기와 청신한 활력을 주었다.


미국이 영국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마침내 성공한 것도 이 무렵이다.


프랑스는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었는데, 1789년의 바스티유 감옥의 파괴에서 발단한 역사적인 대혁명은 수행되고, 영화를 자랑했던 루이 16세의 일족을 단두대(단두대)에 보낸 것은 베토벤이 22세 때였다. 이것은 유럽만의 일이 아니고 전세계가 무엇이건 새로와져야 하는 때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어 유럽에서는 미증유의 공포시대에 들어간다. 나폴레옹 1세는 대혁명의 뒷처리에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예술의 보호자였던 귀족들의 그 재력도 권력도 점차 위태로와지기 시작하였다. 음악가도 귀족의 살롱을 나와 도시의 극장이나 공회당에서 민중을 상대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연주를 하거나 해야 한다.


살롱에 초대된, 예의범절에 밝은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을 때는 비평 등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이미 특권 계급의 도구가 아니게 된 음악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으러 오는 민중의 비평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처럼 만인 대상의 무난한, 단지 차의 향기를 북돋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유형적인 것은 말살되고 말았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개성'이다.

 

강렬한 개성, 인간의 마음의 밑바닥에서 스며나오는 힘찬 정열과 미묘한 정서의 표현이야말로 민중이 구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풍부한 인간성의 표현에 그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고도의 연주 기술, 잘 울리는 악기, 정교한 구조와 힘찬 표현력을 지닌 피아노, 그리고 수천명의 청중에게 호소할수 있을 만큼의 색채와 음량이 풍부한 오케스트라, 또 그러한 연주를 언제든지 할 수 있게 하는 커다란 자본 능력을 필요로 했다.


베토벤의 시대를 경계로 하여 이 여러 가지 조건은 착착 실현되어 갔다. 다만 모든 것이 단번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예술가에게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많고, 아직 옛 귀족계급은 여전히 음악예술에 대해서는 옛날 그대로의 커다란 세력이었던 곳도 있다. 민중이라고 해도 진짜 예술애호가는 주로 그 속의 지식계급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러나 이미 세상은 바뀌었다.


살롱에 초대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훌륭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전주의 양식의 음악이 차츰 그 존재 이유를 약화시키고 있음은 이미 시간의 문제이다.


그러면 음악의 양식은 어떻게 변해갔을까. 먼저 고전주의 시대의 장식취미의 예술보다 좀더 주관적인 인간의 혼의 외침을 듣고 싶다는 요구에서 깊이와 중후한 맛이 있는 악곡이 잇달아 나왔다.


베토벤 후기의 피아노 소나타나 현악 4중주곡, 또 제9교향곡, 미사 솔렘니스 등은 당시의 젊은 작곡가였던 슈베르트, 멘델스존, 베버 등에게 측정할 수 없는 커다란 감명과 그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같은 무렵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는 최초의 본격적인 표제음악인 "환상 교향곡"을 만들고 낭만음악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바 있다.


섬세한 정서나 순간적으로 변하는 미묘한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음악으로, 비로소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짧은 소곡 속에 한없이 풍부한 시적인 정서를 담을 수도 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6개의 악홍의 한 때", "즉흥곡", 멘델스존의 49곡이나 되는 "무언가", 슈만의 "판타지"와 "환상소곡집", 그 밖에 쇼팽과 리스트, 브람스 등의 피아노 소곡 등은 이런 생각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낭만파 음악의 커다란 특색의 하나로 표제음악이 있다. 앞에 말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도 그 걸작의 하나인데, 같은 시대에 멘델스존의 서곡 "핑갈의 동굴"과 괴테의 시를 음으로 그린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등이 있으며, 베버는 십자군 병사의 삽화 하나를 표제로 해서 f단조의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이 뒤를 이은 리스트의 13곡의 교향시 등은 어느 것이나 문학과 관계를 가진 표제음악이다.


예술가곡도 낭만파의 풍부한 소산이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볼프, 리베, 그 밖에 많은 작곡가는 시와 노래와 반주가 혼연일체가 된 뛰어난 예술가곡을 만들어 냈다.


19세기 낭만파의 시대는 또 명인의 시대라고 일컬어질 만큼 기악, 성악에 우수한 연주가가 많이 나온 때이다. 피아노는 쇼팽, 리스트, 클라라 슈만 등을 비롯해서 멋진 기교와 표현력을 지닌 피아니스트가 잇달아 나타났다.


또 바이올린에서는 귀재라고 일컬어졌던 피가니니를 위시하여 시포어, 비외탕, 비에냐프스키, 사라사테 등. 또한 이들은 많은 뛰어난 문제를 양성하여, 기악 연주의 수준은 이 시대에 일찌기 없었던 진전을 보여 준 것이다.


관현악은 더욱 색채를 화려하게 했고, 그 악기 편성은 아주 방대하였다.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 말러, 리햐르트 시트라우스 등의 놀랄만한 대규모의 편성은 무릇 음악적 표현 능력의 절정에 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발달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가능케 한 이유의 하나는 기계 공업의 발달로 악기의 구조가 진보되고 개량이 촉진되어 우수한 악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 점과, 또 하나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규모가 큰 교향악단의 경영이 합리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한 점, 그리고 또 음악이 문학이나 회화 등의 내용을 표현하려고 하여 더욱더 오케스트라의 커다란 표현 능력을 요구하게 된 결과이다.


고전파 시대에는 유럽 중에서도 일류의 문명국 즉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의 중심도시인 베를린, 빈, 파리, 런던, 로마, 등은 그 음악의 양식이 매우 공통되어 있어서 거기에 확실한 민족성의 차이는 별로 없었고, 예컨데 파리의 궁정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은 그대로 빈의 궁정에도 통용된다는 식으로 국민적인 개성은 오히려 희박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낭만파의 시대에는 작곡가나 연주가의 개성이 존중받게 된 것과 동시에 나라나 민족의 개성도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요구되게 되었다. 이것은 낭만파 시대의 말기에 가까와짐에 따라 더욱 성해지고 각국에 국민음악을 수립하려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고전파 시대에 문명국의 중심에서 오히려 제외되어 있었던 주변의 나라들일수록 성해졌던 것이다. 즉 러시아, 북구의 여러 나라,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 스페인 등이다. 

 

각 민족이 그 전통적인 음악의 요소를 기반으로 해서 그 국민에게 고유한 감정이나 정서를 사양하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내어 거기에 강한 개성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낭만파의 음악이 기울어진 뒤에도 현대음악 위에까지 더욱 힘차게 추진되고 있는 특색의 하나이다.


낭만파 음악은 오페라와 발레와의 무대예술 위에도 극도로 화려한 발전을 보여주었다. 아직 베토벤이 살아있던 1821년에 베버가 최초의 국민작인 낭만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발표한 뒤, 지금까지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작곡가나 청중도 대단한 오페라열에 들떠서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종종 오페라를 창작하여 상연케 되었다. 

 

그 결과 무대 장치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사치한 의상과 등장 인원의 수, 오케스트라의 편성까지 차츰 대구모가 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가수가 많이 나온 점, 앞을 다투어 대가극장이 속속 건설된 사실에 의해서 19세기는 '오페라의 시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 개혁이라는 대작업이 있고 새로 악극이라는 분야로까지 발전한 셈인데, 이것은 앞의 '오페라'의 항에서도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낭만주의는 19세기의 후반을 사상 공전의 화려한 음악 예술로 장식한 셈이지만, 또 일면에서는 다소 지나친 재앙도 초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낭만음악이 가장 아름답게 여겨졌던 특색이 지나치게 과장된 사실과, 시대의 추이에 의한 인간의 감각이 하루하루 새로와져간 사실에 의한 결과이다.  

 

예컨데 개성적, 주관적인 표현도 도를 넘으면 공허한 환상을 쫓게 되고, 개인적인 정서도 너무 이것을 추구하면 건강하지 못하고 병적이 될 우려가 있다. 비르투오소(명인예)만 하더라도 너무 연주가의 개성이 강조되면 악곡 본래의 모습이 일그러지거나 개인적인 취미에 취우쳐 청중은 그 음악에서 공허한 것을 느끼게 된다.


문학적인 사상이나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하려 하는 경우에도 너무 지나치면 음악은 문학의 내용을 설명키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악을 위해 비로소 존재하므로 그 아름다움은 음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 문학이 없고서는 음악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만연해 왔다. 그리고 음악 속에 문학 등을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바하의 음악과 모짜르트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문학은 음악에 있어서 악처와 같은 것이다"라고 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하로 돌아가라"고 하는 이른바 신고전주의도 나왔다. 그리하여 낭만주의의 음악은 이윽고 과거의 것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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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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