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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 23. 향수로만 남기엔 안타까운 ‘그건 너’

 

강근식, 나현구, 이장희: 잊혀진 사람

 

지난해 가을 이장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조영남의 ‘마지막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한 일이 있었다. ‘30년만에 무대에 오른 이장희’라는 식으로 떠들썩할 법도 했건만 의외로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은 범상치 않았다. 1970년대 전반기 그의 대표곡인 ‘그건 너’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두 곡이 연주되었을 때 스냅 사진처럼 1970년대의 특정 시점이 스쳐 지나갔던 것은 물론이다.

 

1973년 언젠가 이장희의 ‘그건 너’가 소리소문 없이 몰고 온 파장을 실감있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건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처럼 ‘지성의 사색’이라는 여과도 필요 없이 그냥 몸에 꽂히는 효과였다. 

 

구어체의 생생한 가사, 필요할 때 터져 주는 후렴구, ‘음치’ 같지만 강렬한 가창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가 흐른 뒤의 맥빠지는 음악평론식 해설일 뿐이다.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기운을 겉치레 없이 순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한 것은 이장희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이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장희의 작곡과 노래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장희를 ‘포크 가수’라고 부른다면 이 음악의 실체에 절반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장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이 없었다면 이장희도 없었다. ‘그건 너’의 후렴구를 다시 들어 보라.

 

이장희의 노래와 강근식의 기타는 마치 선창과 후창, 이른바 콜 앤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처럼 능숙하게 주고 받기를 반복한다.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가 이렇게 잘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은 음악을 조금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연대 생물학과를 중퇴한 이장희와 홍대 조소과를 졸업한 강근식의 만남은 1960년대 후반의 ‘생음악 살롱가’에서 활동하던 듀엣 ‘이장희와 강근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장희는 연대 재학시절 윤형주와 함께 ‘라이너스’라는 보컬 그룹으로 활동했고, 강근식은 ‘홍익 캄보’라는 그룹을 만들어 학내에서 활동했고, 그러다가 세시봉 그룹의 일원인 이상벽(!)의 소개로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랴. 이장희도, 강근식도 잊혀진 마당에 말이다.

 

 

어쨌든 이장희와 강근식은 ‘한 잔의 추억’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나야 나’ 등으로 이어지는 로킹(rocking)한 리듬의 곡으로 이유없는 불만에 차 있던 젊은 애들(특히 남고생)의 꼭지를 돌게 만들었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촛불을 켜세요’, ‘잊혀진 사랑’ 등의 발라드로 여고생들의 가슴을 살랑거리게 만들었다.

 

10대 청춘 군상들이 시커멓거나 새하얀 것 아니면 입을 옷이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이 모든 현상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은 1972년 12월 2일 드라마 센터와 1974년 4월 14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이장희 리싸이틀’일 것이다.

이장희와 강근식보다 더 잊혀진 인물도 있다. 다름 아니라 이장희의 음반을 필두로 비로소 때깔이 좀 나는 앨범(LP)을 국수 뽑듯 말아 내던 나현구 사장이라는 이름이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라는 또하나의 전설적인 프로덕션이자 스튜디오를 통제했던 나현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듀서였다. 

 

이장희를 비롯하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연실, 조동진, 양병집, 김의철, ‘현경과 영애’ 등 포크 계열의 가수들을 발굴하거나 스카우트하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음반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서울대학교 공대 출신으로 음반업계에서 보기 드문 대졸 경력을 가진 그의 활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맹숭맹숭한 말 이전에 ‘팩트’라도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신파조의 발라드로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사용하는 몰역사적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14집까지 발표되었던 컴필레이션 시리즈 ‘골든 포크 앨범(Golden Folk Album)’의 음원들이 주인이 바뀐 채 ‘가요골든히트’라는 이름의 편집 음반으로 선별적으로만 나오고 그나마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업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꺼내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만들었던, 대마초 파동으로 불리는 ‘그때 그 사건’은 12월이 되면 정확히 30주년을 맞는다. 무슨 사건이냐고? 말하기도 싫다. 그런데 기념도 뭐도 아무 것도 없이 조용하다.

 

가수 데뷔 30주년 어쩌고 하는 공연은 많고, 심지어 인디 음악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없다. 이렇게 계승되지 않고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노스탤지어로만 남아 있는 ‘대중문화의 역사’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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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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