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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애어의 음악감상 입문 - 8. 관현악

(1) 관현악의 발달과 편성법
현대의 기악합주 중에서 가장 큰 조직을 가진 것은 관현악이다.  오케스트라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무대 앞쪽에 있는 무용을 하거나 합창을 하기도 하는 장소의 명칭에서 생겼으며, 후에는 여기에 설치된 객석도 오케스트라석이라 불리게 되었다. 

 

16세기 경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극이 부흥된 뒤, 이 무대와 객석과의 사이에 합창단이나 음악대가 가늘고 긴 위치를 차지하 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음악대를 가리켜 오케스트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관현악을 말하지만, 그와 동시에 극장의 앞쪽 관람석의 명칭도 되고 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그 밖의 음악, 즉 교회나 살롱에서 연주되는 음악과는 달리 떠들썩한 극장의 음악이며, 또 극의 내용을 음악으로 나타내려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보다 한층 화려한 음의 색채, 풍부한 울림, 힘찬 표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 오늘날의 관현악의 시초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기의 편성등도 전혀 아무런 계획이 없고 그때 그때에 따라 가지각색이었다.


처음에는 그 당시 가정 같은 곳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었던 류트, 테오르보 (Theorbo), 작은 하프와 같은 발현악기를 주로하여 여기에 2, 3대의 가로피리를 더한 정도의 것으로서, 지금의 오페라로 생각하면 실내악처럼 작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의 구경꾼은 매우 기뻐했었다. 그 후 오케스트라는 오페라의 발전과 함께 진보하여 온 것이다.

 

 

관현악의 발전에 먼저 획기적인 공헌을 한 것은 1567년 이탈리아의 크레모나라는 곳에서 태어난 몬테베르디라는 오페라 작곡가이다.


크레모나라고 하면 후에 세계에서도 유수하게 뛰어난 현악기를 만들어낸 곳이다. 몬테베르디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활로 문질러서 음을 내는 현악기를 많이 오케스트라에 사용했고, 다시 트롬본, 코넷, 트럼펫 등의 금관악기와 플루트를 비롯, 클라리온이라는 클라리넷의 전신이 되는 목관악기 등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었던 화려한 효과를 올렸다.

 

바이올린같이 활로 켜는 현악기에 트레몰로라는 주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이 몬테베르디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새로운 기술을 곳곳에서 사용하여 당시의 오케스트라가 지닌 표현능력을 크게 넓혔다. 트럼펫이나 코넷에 약음기를 사용하는 일조차도 당시 이미 고려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몬테베르디가 1624년에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해서 상연했을 때는 너무도 그 수법이 새로왔으므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크게 놀라 당황하 면서 처음에는 연주하기를 거절할 정도였으나, 막상 해보니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예기하지 못했던 멋진 색채적 효과와 힘차고 극적인 박력에 청중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몬테베르디보다 약 백년 가까이 늦게 나타난 알렉산드로 스카롤랏티라는 사람도 또한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였으며, 따라서 오케스트라의 개선에도 힘을 다한 사람인데, 이 백년 동안에 바이올린계의 현악기는 그 제작법과 연주법, 또는 작곡상으로도 커다란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스카를랏티는 이 각종 현악기군을, 합창인 경우의 목소리의 취급과 마찬가지로 4개의 그루프로 나누어 소프라노에 해당하는 곳에 제1바이올린을, 알토에 제2바이올린, 테너 부분에 비올라를, 그리고 베이스에 해당하는 1군을 첼로와 더블베이스에 맡겨서 인성의 4부 합창을 현악기군으로 연주해 보았다. 

 

그러자 이것은 매우 충실하고 힘찬 효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으므로 이 현악합주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플루트, 버순 등의 관악기를 덧붙여서 색채를 아름답게 했는데 근대의 관현악법의 바탕은 바로 여기서부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합리적이며 또 효과적인 악기 편성은 같은 시대에 프랑스에서 활약하고 있던 륄리 (Jean-Baptiste Lully 1632--1687)에 의해서 더욱 개선되었다. 

 

륄리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성장하여 프랑스에 귀화하고, 루이 14세의 궁정 직속 오케스트라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훌륭한 오페라단을 가졌으며, 새로운 오페라를 많이 만들었다. 오페라 그 자체도, 또 합창 부분에서도 커다란 진보를 보여 주었는데, 그 개막에는 이른바 프랑스식 서곡이라는 장중하고 화려한 곡을 연주하는 것을 비롯하여 발레 장면 등도 많이 넣음으로써 오페라에 있어서의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졌고 그 때문에 한층 이것을 대규모로 조직하여 기술도 향상시켰음은 륄리의 커다란 공적이다. 


그 무렵 오페라와는 별도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해서 바이올린의 연주 기술이 급속히 향상되있고 작곡상으로도 크게 발전하였다. 바이올린의 대가 코렐 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와 비발디가 잇달아 나타나 이 악기의 고도의 기술을 오케스트라에도 응용하여 협주곡(콘체르토)이나 모음곡을 많이 작곡했으므로 관현악의 효과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표현력도 풍부해졌다. 

 

여기에 가장 장려한 울림을 준 것이 대작곡가인 바하와 헨델이다.  바하는 교회음악과 실내악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오케스트라를 위해서도 4개의 모음곡과 6개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작곡했으며 관현악의 수법에 관한 많은 효과적인 시도를 하였다.


헨델은 많은 오라토리오와 함께 대중적인 오페라를 수없이 만들었다. 이것은 대극장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 많았으므로 그 오케스트라의 악기편성도 바하보다 더욱 화려했고, 외면적인 효과도 크게 발휘하여 청중을 감격시켰다. 

 

그 오케스트라는 많은 트럼펫과 트롬본이 북소리와 함께 빛나게 울려퍼졌던 것이다. 그 무렵 남독일 라인강의 상류에 있는 만하임의 궁정음악가들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오케스트라의 수법이 발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타미쯔(Jogann Wenzel Anton Stamitz 1717--1757), 필츠(Johann Anton Filtz 1733--1760), 칸나 비히(Christian Cannabich 1731--1798)와 같은 사람들은 수백년 전부터 바하, 헨델에까지 발달해온 음악, 즉 교회음악에서
발전한 장중하고 중후한 음악에서 둘변하여 좀더 밝고 경쾌한 음의 사용법을 생각해 냈다. 

 

이것은 이미 이탈리아에서 번창하고 있었던 아르스 노바(ars nova 신예술파)의 영향에 따른 것인데, 그 음악의 명랑한
즐거움은 대단한 형세로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되어 갔다. 


만하임의 궁정에서는 당시 유럽에서도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이 단체가 먼저 새로운 양식에 의한 악기의 편성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 악단의 우수 한 연주 기술과 함께 그 무렵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강약의 변화에 획기적인 음영을 지닌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헨델의 시대에는 개개의 연주가가 강약을 붙인다고 하는 기술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합주 때에 작곡자가 강한 음을 요구하는 곳은 악기의 수를 늘리고, 약한음을 원할 때는 그 수를 줄인다는 간단한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헨델이 어느 곳에서 오페라를 상연했을 때는 10개의 오보를 사용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을 정도인데, 이런 일은 바그너의 오케스트라에서 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당시는 악보에도 강약의 기호는 거의 없고 단지 '총주'라든가 '단주'라는 문자만으로 수를 증감하여 그 강약성(다이내믹)의 표정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하임의 지휘자들은 현악기 주자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잡한 표정을 요구했다. 종래의 '총주, 단주' 식으로는 약음에서 차츰 강해지는 크레센도(점점 세게)나 그 반대인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의 효과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지만, 만하임의 오케스트라는 그것을 손쉽게 해냈다. 

 

또 전체가 약음으로 연주되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강음으로 바뀌는 스포르짠토 등도 쉽게 할 수 있게 되 었다.  당시의 청중도 이 새로운 효과에는 몹시 놀란 모양인 듯, 이런 것을 기록한 사람이 있다. 

 

"연주중 크레센도의 부분에서는 청중이 모두 일제히 숨을 죽이고 의자에서 허리를 들었다. 또 디미누엔도로 연주할 때는 가슴 속에 가득 들이마신 숨을 토해 냈고, 들었던 허리를 의자에 내렸다." 이 기록은 조금 과장해서 쓴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당시의 청중이 만하임의 오케스트라를 듣고 음악적인 새로운 경험에 눈이 휘둥그래졌는가 하는 사실의 일부를 알 수 있다.


이 만하임 악파의 신선한 여러 가지 수법은 유럽 전체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우아하고 섬세하며 또 힘차고 명쾌한 표현력이 작곡가들을 자극하여 더욱 많은 뛰어난 작품을 낳게 된다. 

 

모짜르트가 소년 시대에 만하임을 찾아가 그 곳의 오케스트라를 들었을 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아름다운 연주를 들었다고 하면서 감격했다고 하는 아야기도 있다.


오케스트라가 이처럼 섬세한 표현을 하거나, 또 인원수가 많아지면 악곡의 올바른 해석을 단원 각자가 명확하게 파악하여 통일된 연주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자면 지휘자의 역할이 한층 무거워진다. 

 

그 당시까지의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하프시코드(쳄발로) 를 치면서 전체의 연주를 정리하거나, 바이올린의 수석 주자가 자기도 연주하면서 지휘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관현악의 편성은 음의 충실함을 보더라도 완전한 것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하프시코드의 음을 첨가할 필요는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사 지휘자가 단원으로 부터 독립하여 지휘봉으로 음악을 진행한 것이 무렵부터이다.


이 시대의 대작곡가 하이든은 교향곡만도 백곡 이상이나 썼을 정도의 다작가로서 '교항곡의 아버지' 라고 불리웠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그는 평생을 통하여 오케스트라의 편성법의 발전과 정비에도 진력하여 오케스트라의 기본을 쌓아 올렸다.

 

지금의 어떤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도 하이든의 관혁악이 그대로 확대 증강된 것에 불과하다. 하이든이 그 제1교향곡을 쓴 것은 그가 27세 때의 일인데 그 편성은 다음과 같다. 

  • 목관악기 오보(2) 
  • 금관악기 흔(2)  
  • 현악기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각수명).   

그가 이보다 40년 후, 즉 원숙기에 이른바 '영국 교향곡집'에 사용한 편성은 이 최초의 것에 다시 다음의 악기를 첨가시켰다.

  • 목관악기 플루트(2), 클라리넷(2), 버순(2).  
  • 금관악기 트럼펫(2)  
  • 타악기 팀파니(1쌍)

위의 편성이 이른바 2관 편성인데 이 형은 그대로 모짜르트, 베토벤으로 계승되었다.

 

하이든의 '영국 교향곡집' 중 "군대 교향곡"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곡에서는 그 밖에 큰북, 심벌, 트라이앵글 등 3종의 타악기가 참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오히려 특별한 경우이며, 이 3종의 타악기는 베토벤이 "제9번 교향곡"에 사용할 때까지는 교향곡에 쓰인 예는 거의 없다.


이 2관 편성은 당시부터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표준형이 되고 19세기에 이르러 슈베르트나 멘델스존 등 낭만파의 작곡가에게까지 계승되지만, 그대로가 아니라 조금씩 확대되어 갔다.


하이든과 거의 같은 시대에 나온 프랑스의 작곡가 고섹(Francois joseph Gossec 1734--1829, 우리나라에서는 고섹의 가보트 작품으로 유명)도 또한 관현 악법의 연구에 힘을 쏟 은 사람으로, 그가 1970년에 작곡한 1기의 레퀴엠은 당시의 청중을 아연케하리만큼 새로운 수법을 갖고 있었다. 

 

이 레퀴엠이 처음으로 어느 큰 교회에서 연주되었을 때, 교회에 모인 사람 들의 눈에 비친 것은 파이프 오르간을 등진 음악대의 자리에 현악을 중심으로 하는 보통의 오케스트라가 합 창단에 둘러싸여 있는 것뿐이었으나, 차례로 곡이 진행되다가 이윽고 제2악장 (진노의 날) 끝 부분에 가까워질 무렵 '마지막 나팔이 울려퍼지는 순간'이라는 매우 장엄한 부분에 이르자 갑자기 교회당 밖에서 대기하던 트럼펫, 혼, 트롬본등 금관악기가 일제히 놀라울 정도로 장려한 코랄을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선고인양 불어댄다. 


동시에 교회당 안의 오케 스트라에서는 많은 바이올린이 높은 음역의 트레몰로로 마치 천사의 합창처럼 숭고한 음향으로 이에 응한다. 이 빛나는 연주의 효과는 당시의 관현악법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확실히 사람들 을 놀라게 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베토벤은 하이든의 만년의 관현악 편성을 대체로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그가 불후의 9개의 교향곡을 쓰는 동안에 그는 많은 독창적인 수법으로 여기에 새로 악기를 첨가해 왔다. 

 

제5교 향곡에는 당시의 교향곡으로서는 최초의 시도로서 픽콜로, 더블버순, 트롬본 등을 첨가했으며, 또 제3교향곡
"영웅"에는 처음으로 3 개의 혼을 사용하고 "제9번"에 이르러 4개의 혼을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각 악기의 성능과 그 역할을 충분히 살려 그 집단과의 관계를 명백히 하고 합주 전체의 기능을 그가 구했던 커다란 예술적 표현에 잘 어울리도록 넓힌 것이었다. 

 

즉 관현악법의 형식상의 혁신이라기보다는 하이든의 2관 편성이 근대 관현악법의 기본으로서 참으로 훌륭한 것이며, 장차 이것이 한없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불후의 명곡을 통해 확고하게 뒷받침한 것이 베토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베토벤은 오케스트라의 역사상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이다. 베토벤이 제9교향곡에 사용한 관현악 편성은 다음과 같다.

  • 목관악기: 플루트(2), 픽콜로(1), 오보(2), 클라리넷(2), 버순(2), 더블버순(1).
  • 금관악기: 혼(4), 트럼펫(2), 트롬본(3).
  • 타악기: 팀파니(1쌍), 큰북, 심벌, 트라이앵글.
  • 현악기: 제1,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각군).

여기에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자 각각 한 사람과 백명 이상의 합창이 딸린다. 이 악기 편성이 지금도 가장 많은 경우에 사용되는 표준적인 것으로서, 이 가운데 혼과 트롬본은 각각 4대, 3대이긴 하나 편의상 이것을 2관 편성이 근대 관현악법의 기본으로서 참으로 훌륭한 것이며, 장차 이것이 한없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불후의 명곡을 통해 확고하게 뒷받침한 것이 베토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베토벤은 오케스트라의 역사상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이다. 베토벤이 제9교향곡에 사용한 관현악 편성은 다음과 같다.

  • 목관악기: 플루트(2), 픽콜로(1), 오보(2), 클라리넷(2), 버순(2), 더블버순(1)  
  • 금관악기: 혼(4), 트럼펫(2), 트롬본(3)  
  • 타악기: 팀파니(1쌍), 큰북, 심벌, 트라이앵글  
  • 현악기: 제1,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각군)

여기에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자 각각 한 사람과 백명 이상의 합창이 딸린다. 이 악기 편성이 지금도 가장 많은 경우에 사용되는 표준적인 것으로서, 이 가운데 혼과 트롬본은 각각 4대, 3대이긴 하나 편의상 이것을 2관 편성이라 부르고 있다. 또 흔히 이것을 베토벤형 편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베토벤의 시대를 하나의 경계로 하여 관현악에서 활약하는 모든 악기는 저마다의 특색에 따라 각각 그 임무가 매우 무거워졌다. 예컨대 지금까지 단지 합주의 낮은 음을 맡고 있던 첼로와 더블베이스도, 그리고 버순이나 혼의 낮은음도, 베토벤의 작품에서는 제각기 명확하게 따로따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하이든의 시대보다도 훨씬 어려운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베토벤의 만년부터 유럽의 음악은 이른바 낭만파 시대가 된다. 낭만파의 작곡가들은 먼저 베토벤의 관현악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것을 발전시키고 더욱 새롭고 생생한 정서와, 힘차고 극적인 감정을 고조시켜 19세기의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황금시대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베토벤의 오케스트라를 직접 계승한 것은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이며, 이것을 오페라 혹은 악극 위에 크게 키워낸 것이 베버와 바그너였다.

 


오페라에서는 무대의 진행에 따라 음악도 매우 커다란 표현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화려한 느낌, 환희에 찬 느낌, 처절한 감정, 슬픈 감정 등은 극의 발전과 함께 오케스트라가 관중을 긴장시키거나 흥분시키가도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작곡가들은 모두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그 관현악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옛날부터 오페라라 하면 오케스트라의 편성은 점점 대규모가 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헨델이나 모짜르트 등의 무렵에도 협주곡이나 교향곡은 대개는 살롱에서 연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악기 편성은 비교적 작아도 괜찮았지만, 그들이 오페라를 만들 때에는 악기의 종류나 그 수도 훨씬 많이 사용되었다. 

 

베토벤 이 후에는 교향곡도 또한 대극장으로 진출했으므로 그 악기 편성도 오페라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게 되었는데, 그래도 오페라를 많이 쓴 작곡가는 극적인 효과를 더욱 증대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악기 편성을 사용했다.


바그너는 지금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에 바탕을 둔 오페라가 연극과 음악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종합 예술로서는 많은 결점을 갖고 있음을 불만으로 여기고 '오페라 개혁'이라는 높고 원대한 이상 아래 새로 '악극'을 창시하였다. 


바그너는 이 이상을 실현하려면 도저히 종래의 관현악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목관악기, 금관악기를 3대씩, 이른바 3관 편성으로 하였다.

 

그 위에 잉글리쉬 혼이나 베이스 클라리넷, 튜바, 더블베이스 등을 참가시켰다. 물론 관악기가 이만큼 많아지면 이보다 음량이 작은 현악기의 각 군도 2배 가까이 증원하지 않으면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바그너는 이 새로운 3관 편성으로 '악극'을 시작하기 전의 마지막 오페라인 "로엔그린"에 서시도 하여 1850년에 비로소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바그너는 아직 만족할 수가 없어서, 후에는 필요에 따라 좀더 관악기의 수를 늘리고 자신이 고안한 바그너 튜바라고 하는 혼과 작은 튜바 중간 크기의 악기를 혼의 수만큼 참가시키기도 하였다.


바그너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나온, 헝가리의 대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기도 했던 리스트와, "환상 교향곡"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는 둘 다 관현 악법의 대가로서, 그 풍부한 체험을 많은 교향곡이나 교향시의 명곡 속에서 실천하고 훌륭하게 이론화하였다.

 

이 대가들은 표제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표제음악은 오페라나 악극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관념이나 감정, 사상까지도 마치 문학처럼 음악으로 그리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오케스트라에도 풍부한 색체와 음영 등이 힘찬 묘사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케스트라의 편성은 점점 커지고 그 효과는 더욱 화려해 졌는데, 거기에는 또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다. 작곡가가 아무리 음악의 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해도, 그 머리 속에서 생각한 주문대로의 음을 자유자재로 악기가 내어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작곡가의 요구는 차츰 커져서 뛰어난 연주가를 모아들이고 뛰어난 연주가는 끊임없이 악기의 구조나 성능에 대해 그 개량을 요구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금속공업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관악기도 크게 개량되었다. 예를 들면 독일의 테오발트 뵘(Theobald Boehm 1794--1881)이라는 사람이 플루트의 구조를 연구하여 금속제의 키를 눌러 관에 붙어 있는 구멍의 뚜껑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장치에 대해 커다란 개선을 했으며 플루트 이외의 목관악기에도 이 원리가 응용되어 오늘날의 이른바 뵘식 악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또 나팔류, 혼이나 트럼펫 등에도 여러 가지 개량이 가해진 결과, 그 때까지는 도저히 불 수 없었던 어려운 곡과 빠른 곡도 불 수 있게 되어, 관현악에 이 악기를 사용한 경우의 효과로 대단한 진보를 보게 되었다.


또 하나는 고전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어느 것이나 왕후 귀족이나 부호의 개인 소유인 경우가 많았지만,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봉건 제도가 차츰 무너지고 새로운 자본주의가 일어났다. 

 

원래 대편성의 오케스트라를 경영하는 데는 거액의 경비가 들기 때문에 개인의 힘으로 지탱해 나가기에는 스스로 한게가 있다. 오페라단이나 오케스트라를 경영하는 자본 형태도 속속 변해가고 있었던 시대이다. 

 

그래서 종래보다 좀더 큰 자본, 대중에 의해 유지되는 대자본이 투입되어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편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그너의 3관 편성은 마침내 대작인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이르러 4관 편성이 되었다. 이것에 의하면 각 관악기마다 4성부의 화성군을 갖고 그 표현력은 더욱 충실해진 셈이다.


그 후 구스타프 말러, 리햐르트 시트라우스,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등은 점점 대규모의 악기 편성을 시도하고 악기에 따라서는 6관, 8관에 달하는 것도 많이 나왔다. 그러면 말러가 제2교향곡 "부활"에 사용했던 악기의 편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목관악기: 픽콜로(4), 플루트(4), 오보(4), 잉글리쉬 혼(2), 클라리넷(3), 베이스 클라리넷(1), E플랫클라리넷(2), 버순(4),
더블버순(1).
  금관악기: 혼(6), 트럼펫(6), 트롬본(4), 튜바(1).
  타악기: 팀파니(6개), 큰북(1), 심벌(1쌍), 작은북(1), 트라이앵글(1), 탐탐(고저2), 글로겐시필(1), 큰종(3).
  건반악기: 파이프 오르간(1).  무대에서 떨어진 객석 속에 혼(4), 트럼펫(4), 팀파니(1쌍), 그 밖의 타악기 몇대.
  현악기: 제1,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현악기만으로 70명 이상),하프(2).
  성악: 알토 독창자(1), 합창단(수백명).


이쯤되면 이미 음악의 아름다움도 그렇거니와 그보다는 이 대규모의 합주를 눈으로 본 장대 호화로운 위용, 대음향이 소용돌이 치는 속에 스며든 관능적인 상쾌함과 같은 사치한 효과를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20세기가 되어 그토록 전성기를 맞이했던 낭만주의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이러한 대규모의 관현악 편성도 점점 수그러들고, 근년에는 좀더 간결하게 정리되어서, 직절적인 방법으로 좀더 투명하면서도 보다 많은 인상의 깊은 효과를 내는 관현악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관현악의 연주를 무대에서 보면, 각각 자기가 맡은 악기를 가진 70명에서 백명에 달하는 단원이 배치되어 있다. 그것도 단지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수백년의 역사와 경험에 의해서 될 수 있는 대로 합리적으로 아름다운 연주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데 그 방법에는 몇가지의 형이 있다. 

 

다음에 그림과 사진으로 나타내어 보자. 그림A는 유럽에서 많은 악단이 사용하고 있는 형이다. 그림B는 근대 이후 미국에서 시작된 방법으로 지금은 유럽에서도 이렇게 배열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있는 교향악단이 있다. 

 

각기 일장일단이 있어서 어느 형이 최상이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주로 지휘자의 의견에 따라, 혹은 그 악단의 전통에 따라, 그 어느 하나의 형을 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아직 부분적으로 다소 색다르게 배열하는 방법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하프나 첼레스타는 A, B 모두 마주 보아 왼쪽, 혹은 오른쪽의, 전방의 가장자리에 두는 경우도 많이 있다.


위에 말한 2관 편성, 혹은 3관 이상의 관현악 편성은 일반적으로 교향곡이나 서곡 등도 연주하는 표준적인 것으로서 이것을 '교향악단' 혹은 '교향관현악단'(심포니 오케스트라)이라고 부르는 수가 있다. 

 

또 이보다 적은 인원의 편성이 되면 '실내관현악단'(살롱 오케스트라) 또는 '소관현악단'이라고 부른다.


표준적인 관현악단의 제1바이올린군(마주 보아 왼쪽 전방) 속에서 지휘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의 바깥쪽에 앉아 있는 것이 콘서트 마스터(독일어로는 콘체르트마이스터)이다. 

 

콘서트 마스터는 그 악단의 바이올린 주자 중에서 기술이 가장 뛰어나고 또 다년간 관현악의 연주자로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 임무를 담당하여 현악기군 전체를 통솔해 가는 것이다. 

 

또한 연주하는 악곡 속에 바이올린을 혼자서만 켜는 곳이 있으면 콘서트 마스터가 이것을 켜도록 되어 있다.

 

 


(2) 지휘자
소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제외하고 보통 표준적인 관현악단의 연주에는 거의 모든 경우에 지휘자가 있으며 이 지휘자가 그 연주를 통일한다.  

 

세계 일류의 모든 교향악단은 앞을 다투어 뛰어난 지휘자를 맞아들이고,  그들 노련한 명지휘자에 의해 더욱 더 교향악단의 진가를 발휘하도록 힘쓰고 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중앙, 맨 앞의 단위에 서서 악단을 구석구석까지 바라다보고, 여기에서 악곡의 진행에 수반하여 자기의 뜻대로 악단을 움직여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현악단을 하나의 피아노로 본다면 지휘자는 피아니스트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피아니스트라도 음이 안맞은 피아노, 음이 잘나오지 않는 낡은 피아노로는 도리가 없다.

 

또 아무리 좋은 피아노라도 이것을 치는 피아니스트의 솜씨가 나빠서는 역시 소용이 없다. 지휘를 한다는 것은 단원에게 지휘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음악을 충분히 내게 한다고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자면 갖가지 악기의 연주 기술과, 그 성능이나 효과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 좀더 중요한 것은 연주하려 하는 악곡에 대한 이해이다. 악곡에 대해서 자기가 이해한 음악적인 의미를 커다란 관현악단에 의해 청중에게 잘 알 수 있도록 들려 준다.

 

그러자면 관현악을 자기의 생각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지휘자는 음악에 대한 많은 지식과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앞에 예를 든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와의 관계와는 달리 제각기 한
사람의 구실을 하는 살아 있는 음악가를 몇십명 움직이는 셈이기 때문에 지휘자는 그 인간성과 예술적인 인격이 많은 단원간에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지휘자는 17세기 초부터 나타났다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 역할의 필요성은 좀더 오래 전부터 인식되고 있었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남아있는 옛 기록에는 13세기 독일의 미네젱거(Minnesanger, 음유시인의 일종)로 유명한 하인리히 폰 마이센이라는 사람이 그린 합창대와 반주자를 앞에 놓고 긴 막대를 들고 지휘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여러 사람이 하는 합창이나 합주의 박자를 맞추고 그 표정을 일치시키려면 아무래도 누군가 잘보이는 곳에 있는 한 사람의 행동을 목표로 해서 이것에 맞추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지휘자는 이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지휘자는 대개의 경우 그 곡을 만든 사람이라든가, 혹은 단원 모두의 선생격인 사람이 이것을 맡아 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지휘자의 역할과 그 필요성이 명확히 인식된 것은 17세기의 이탈리아오페라가 번성해지게 된 뒤의 일이다. 작곡가가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 이것을 치면서 관현악과 무대 위의 가수들에게 필요한 신호를 주어 이것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하프시코드를 치는 사이에는 손을 흔들기도 하고 몸을 움직여 신호를 하거나, 때로는 발로 바닥을 쿵쿵 눌러
박자를 짚기도 했을 것이다.

 

이 하프시코드를 치면서 지휘를 하는 방법은 널리 이탈리아에서 행해지고 그로부터 프랑스로 들어가 륄리, 라모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보급되었으며, 륄리의 제자였던 퍼셀에 의해 영국에서도 행해졌다. 또 독일의 오페라작곡가 쉬쯔(Heinrich Schutz 1585--1672)도 이탈리아에 들어가 페리(Jacopo Peri 1561--1633)라는 사람이 쓴 오페라 "다프네"를 독일에 가지고 돌아가 드레스덴에서 상연했을 때 이 지휘법도 함께 수입했으므로 독일에서도 이것이 보급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형태의 지휘법은 19세기 초엽까지 유럽 전지역에서 행해졌던 것이며 하프시코드 주자는 따로 있고 지휘자는 긴 막대를 들고 모두에게 잘 보이도록 박자를 짚는 수도 있다. 막대 대신에 악보 등을 가늘고 길게 말아서 드는 수도 있었다. 때로는 이렇게 말은 종이를 양손에 한 개씩 들고 지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륄리가 그 많은 오페라를 지휘할 때는 하프시코드 자리에 앉고, 또 궁정 직속의 악장으로서 무도회나 궁정음악회 때에는 지휘봉을 들고 관현악단 앞에서 화려한 지휘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 이래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파리의 음악회에서는 눈부신 지휘봉이 유행하였고,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역시 소박한 하프시코드의 지휘가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짓궂은 평론가였던 장 자크 루소는 "유럽에서 파리의 오페라만은 지휘자가 멋대로 막대를 휘두르고, 단원들은 이것에 맞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밖의 곳에서는 지휘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서있지만 단원이 잘 맞춰서 연주하고 있다"고 험담을 했다는 것이다.

 

화려한 지휘의 원조라고 일컬어졌던 륄리는 어느 때 너무 지나치게 신바람이 나서 절도를 잃고 그 장기인 긴 지휘봉을 크고, 격렬하게 휘두른 순간, 그만 자기의 무릎을 세게 쳐서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가 곪은 것이 원인이 되어 1687년 3월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이 시대부터 잠시 동안 지휘봉을 흔드는 일과 하프시코드의 자리에서 지휘를 하는 일은 병행해서, 어느 쪽이든 간에 지휘자의 역활은 합주 전체의 박자나 속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확하게 맞춰서 음악을 진행시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관현악의 합주를 하는 기술이 시대와 함께 진보하여 단지 박자를 맞추고 강약을 맞추는 정도의 일이라면 지휘자 없이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을 지나 관현악의 인원수도 30명, 40명 등 대편성이 되고 악보의 내용도 점점 복잡해져 갖가지 감정을 교묘하게 표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그 내용을 바르게 '해석'하여 이것을 많은 단원들의 연주 위에 정확하게 나타내는 일이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이것은 1820년 경부터 갑자기 성해지기 시작한, 이른바 낭만음악의 경향이며 인간의 가진 섬세한 정서나 정열 등을 크게 나타내려 하는 경향의 음악이 자주 만들어지게 되고 나서 점점 중요시되어 관현악의 편성은 더욱 더 증대하여 '표제음악'의 발달과 함께 그 악곡을 '해석'하는 명언도 잇달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지휘자는 언제나 단원의 움직임을 보면서 지시를 해야 한다. 스스로 하프시코드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뜻대로 지휘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차츰 모든 지휘자가 하프시코드에서 떠나 중앙의 지휘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음악사에서는 1829년 5월에 멘델스존이 런던에서 자작의 교향곡을 지휘했을 때, 피아노 옆에 앉아 이것을 이따금 치면서 지휘를 했다는 것이 이 구식 지휘법의 마지막 기록이 되고 있지만, 이 보다 이미 9년 전에 당시의 작곡가이며 명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던 시포어라는 사람이 "요즈음에는 교향곡이나 서곡의 연주에 피아노나 하프시코드를 치면서 지휘를 하는 사람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쓴 바 있다.  

 

현대의 지휘자는 먼저 악곡을 바르게 해석해서 이것을 관현악이나 합창의 연주에 완전하게 나타내어 간다고 하는 음악성과 그 기술이 필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자면 첫째로 복잡한 악보를 빠르고 정확히 읽고 그 형식상의 표현은 물론, 그 음악이 갖고 있는 의미를 똑똑히 파악하여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형식이나 의미뿐만 아니라 작곡자가 그것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깊은 정신, 사상까지 듣는 이에게 전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세계의 대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악보도 지휘자가 사용하는 악보는 관현악의 각 악기의 분담을 모조리 나타낸 것으로, 상당히 복잡한 것이다. 이것을 한 눈으로 쭉 훑어 보면서 피아노로 계속 쳐 볼 정도의 힘이 없으면 좀처럼 지휘자가 될 수 없다.

 

이 지휘자용 악보를 '총보'라고 하며 영어로는 '소코어(Score)', 독일어로는 '파르티투르(Partitur)', 프랑스어로는 '파르티시옹(Partition)'이라고 한다.  

 

관현악용 총보는 맨 위쪽에 목관악기, 다음에 금관악기의 각 군을 적고, 그다음에 각종 타악기를 적는다. 여기까지는 그 각 악기의 수까지 알 수 있도록 숫자가 기입되어 있지만, 그 밑에 쓴 현악기의 각 군은 어느 것이나 복수로서 수의 지정은 없어도 보통은 제1, 제2바이올린(각16명), 비올라(14명), 첼로(12명 내지 10명), 더블베이스(10명 내지 8명) 정도라고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성악, 합창, 혹은 독주 악기 등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현악기군과 타악기군 사이에 이것을 적어넣는 것이 통례이다.  

 

앞 페이지에 든 '총보'의 한 예는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 제3막 전주곡의 첫머리이다. 

 


(3) 현악 합주
관현악 속에서 목관과 금관을 제외하고 현악기 군만으로 편성한 합주를 현악합주라고 한다. 영어로는 스트링 오케스트라, 또는 스트링 앙상블이다.  

 

편성은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콘트라바스) 의 5군으로 이루어지고, 여기에 드물게는 하프, 피아노, 첼레스타와 그 밖의 타악기 등을 첨가시키는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는 현악기만으로 조직되는 것을 현악합주라고 한다. 그 인원수는 특별히 일정한 규칙은 없고 각 부의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 좋은데, 그 대부분은 전부 20명 내외인 경우가 보통이다.  

 

현악합주는 모두 같은 개통의 악기뿐이기 때문에 관현악에 비해 색채적으로는 다소 단조롭지만 음색이 맑아서, 우아한 취미를 지닌 음악에 적합하다. 구미에서는 매우 훌륭한 연주 기술을 지닌,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체도 많이 있다.  

 

현악합주로 연주되는 곡목은 헨델, 바하 이전, 즉 18세기 이전의 협주곡이나 모음곡이 많고, 또 모짜르트 등이 현악합주를 위한 세레나데를 여러 곡 쓴 바 있다.

 

19세기가 되어서도 이 현악만의 음색이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 등 외에 그리크, 드보르작, 시벨리우스 등도 명곡이라 할 수 있는 몇몇 작품을 남겼다.

 


(4) 만돌린 합주
만돌린과 기타는 가정음악으로서 또 학생의 음악으로서 널리 보급되고 있는데, 이들 발현악기(활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이든가 발목으로 뚱기는 것)만으로 조직하는 합주도 참으로 즐거운 것이다.

 

이것은 만돌린과 기타 계통에 속하는 악기만으로 합주하는 것이며, 그 편성은 관현악처럼 일정치 않지만, 지금 극히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악기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1만돌린
  제2만돌린
  만돌라(만돌린보다 8도 낮은 악기)
  만도첼로(모양이 더 큰 것)
  기타
  키타르로네(더블베이스에 상당하는 저음부)


여기에 피아노, 첼레스타 등의 건반악기, 또는 하프를 참가시키는 수도 있으며, 또 각종 타악기를 더 하거나 드물게는 플루크 등의 목관악기가 들어가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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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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