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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애언의 음악감상 입문 - 11.음악의 양식

1편. 고대 및 중세 그리고 근세의 음악

 

 

우리들은 매일 여러 가지 양식을 지닌 음악을 경험하고 있다. 아침에 교회에서 중세의 찬송가를 들었는가 하면 낮에는 라디오로 재즈음악을 듣고, 오후에는 음악회에 가서 슈베르트의 가곡에 귀를 기울이고,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젼으로 포크 송을 듣는다는 식으로 동서고금의 음악이 언제나 우리들 현대인의 주위에는 준비되어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현대 문명의 은혜를 한껏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매우 편리한 일임과 동시에 극히 잡다해서, 때로는 머릿속을 정리할 짬도 없이 잇달아 갖가지 양식의 음악이 소용돌이 치며 다가오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 양식은 시대와 함께 항상 쉴새 없이 변하고 머무르는 법이 없다. 예술도 또한 인류의 의식주의 양식이나 사회 상태의 변천에 따라 끊임없이 그 양식을 변화시켜 간다.


음악예술은 어느 시대에나 민족의 전통이며 종교와 결부되며, 혹은 귀족의 손에, 자본 계급의 손에, 또 민중의 손에 의해 그 시대,  그 국민에게 특유한 양식을 만들어 발전해 왔다. 이 발달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음악사의 과제이다. 

 

평소에 우리들이 경험하는 음악도 오랜 시대, 넓은 세계의 그 어느 하나의 양식에 속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반드시 다른 양식의 음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관계를 명확히 머리에 넣어 두는 것은 음악을 감상하려 할 때, 그 이해를 한층 빠르게 하고 또 깊게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자면 음악사를 읽어 인유 사회와 함께 발전해 온 음악과 이것을 오늘날의 양식으로까지 조금씩 겹쳐 쌓아 온 많은 예술가에 관해서,  또 그 가치가 높은 작품에 관해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극히 간단하게 음악의 각 시대에 걸친 양식의 발전에 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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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의 음악

음악은 아마도 인류의 생활이 시작된 최초부터 생활과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농업이나 어업(어업), 그 밖의 노동에 수반된 노래이며, 연애의 노래, 전쟁의 노래, 혹은 종교와 관계가 있는 노래 등의 형태로 주로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것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회화, 공예, 연극, 무용 등의 예술과 함께 성장, 발전해 온 것이다.


처음에는 음악도 이처럼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었는데, 바로 고대인이 토기에 새끼줄의 무늬를 새기거나, 방패의 표면에 무언가 기하학적인 도안을 새기기도 하는 것과 같은 장식의 취미가 인간 생활의 문화를 나타내기 시작한 무렵에는 음악도 또한 예술적인 의식을 갖고 혹은 노래가 되고, 원시적인 기악이 되어 행해지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선율이나 박자를 지닌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민족의 집단 생활이 대규모가 되어 도시나 국가가 만들어졌고, 서력 기원전 약 3천년 경의 고대 바빌로니아의 문화, 고대 이집트의 문화 등은 다소나마 그 유적에 의해 상상할 수가 있다.

 

동시에 그러한 음악에 대해서도 고분의 벽면에 새겨진 회화나 무늬 등에 의해서 당시의 악기와 그것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 등을 막연하게 상상할 수가 있다.


독일의 유명한 음악사학자 쿠르트 작스(Curt Sachs 1881--1959) 박사, 그 밖의 학자의 손에 의해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시대의 종교음악 등을 복원해서 녹음한 것도 있으며, 대략 기원전 6백년 정도 이후의 음악은 현대의 레코드로 들을 수 있다.

 

모두 단음, 무반주이고 마치 경을 듣는 듯한 느낌의 독창이나 제창이다. 이것은 옛 그리스 문자로 표현된 악보를 연주하여 음으로 재현한 것이며, 반주 악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아서, 이것을 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음의 음악은 그리스도 탄생의 시대를 거쳐 9세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동안에 6, 7세기가 되면 로마 법황 그레고리오 1세처럼 교회음악에 주력한 권위자도 나타났고,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 세계 최초의 음악학교)도 창설되어서 음악의 조직적인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화성법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수학자에 의해서 그 이론적인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음악 예술에까지 이것을 응용하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 때에 만들어진 (그레고리오 성가)는 오늘날에도 로마정교의 교회에서 불려진다. 그러나 그 이전의 것은 앞에 말한 특수 연구용 레코드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이것을 들을 수가 없다.

 

 

 


(2) 중세의 음악

유럽의 중세는 그리스도 음악의 시대이다. 그리고 단음악에서 복음악으로 옮겨져 이것이 완성된 시대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교회에 봉사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발달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 경까지 그리스도교의 사원이나 교회는 이른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건축물이 잇달아 만들어지고 여러 나라의 왕후는 모조리 그 시주가 되었다.


음악은 겨우 이 시대에 극히 원시적인 복음악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이었다. 9세기 중엽 벨기에의 성 아만드의 신부 후쿠발트가 오르가눔이라는 화성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것은 5도라든가 4도라든가의 이른바 완전어울림음을 병행시켜서 만든 것이다. 즉 위의 가락과 아래의 가락이 언제나 5도든가 4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진행해 간다. 

 

그리고 그 처음과 끝은 8도(옥타브)가 되는 일도 있다. 후크발트는 이것을 교회의 합창에 사용하였다. 아마 후크발트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단음의 선율만으로 부르고 있었던 성가에 화성(하모니)을 붙이는 일은 당시의 굉장히 보수적인 교회음악으로서는 대모험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안전제일로,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부분을 놓고 보더라도 5도든가 4도의 완전어울림음이 되고 있으니까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래도 이것은 유치한 하모니이다. 

 

오늘날에도 5도나 4도의 병행은 너무 지나치게 어울려서 도리어 효과가 나쁘다고 하여 일반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 합창을 듣고 처음으로 체험하는 이상한 음의 두께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떳을 것이다. 이 방법은 다소 개량되면서 그 후 3백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12세기 경부터 새로운 화성법인 디스칸투스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2개의 가락이 이른바 반진행하는 것이다. 위의 가락이 올라갈 때는 아래의 가락은 내려간다. 한 쪽이 내려가면 동시에 다른쪽은 올라간다는 방식이다. 이것은 확실히 앞의 오르가눔보다 재미있는 효과를 나타냈다.  

 

다시 14세기 경이되면 포부르동(Fauxbourdon)이라고 하며 3도, 6도니 하는 것과 같은 불완전어울림화음을 병행시킨 것이 이에 더해졌으므로, 복음합창의 효과는 한층 다양한 색채를 갖추게 되었다.


건축과 미술은 그 무렵 이른바 고딕 양식이 전성을 이루고 있었다. 교회나 사원의 건축에는 당시의 과학자, 건축가를 총동원하여 가지각색의 역학적인 신기축을 내놓아 영구적이며 또 천국에도 닿을 것 같은 석조의 대가람이 하늘높이 솟아오르게 되었다. 

 

회화나 조각, 그 밖의 조형미술도 모두 교회건축을 위해 그 기술을 겨루었다. 참으로 그리스도교가 있으므로 해서 예술이라는 느낌을 더욱 깊게 하였다. 정교한 스탠드 글라스도 당시의 화학 공예의 정수를 모아 교회의 로즈 윈도우에서 청, 황, 홍, 백, 흑색의 다섯가지 아름다운 빛을 빛나게 하였다. 

 

이런 세상에서 홀로 음악만이 그 권외에 있을수는 없다. 성가의 합창은 이 대가람에 울려퍼지는 듯한 천사의 목소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점점 일어나고 있던 복음악은 가장 커다란 음악적 효과를 올리려고 열심히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악보의 기보법은 전부터 9세기 경에 발달한 네우마가 12세기 경에는 상당히 개량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진보된 복잡한 합창곡에는 이 기보법이 이미 불편해졌으므로, 이것이 더욱 크게 개량되어 오늘날의 악보와 비슷한 것이 되었으며,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4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약 3백년 동안은 유럽 문화위에 드디어 빛나는 르네상스(문예부흥)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당시의 복음악, 즉 합창의 경우처럼 몇개의 선율이 동시에 진행하는 '다선율식'의 음악도 차츰 복잡하고 아름다운 효과를 내게 됨에 따라 이 많은 음을 정연하게 조직적으로 다루는 그런 가지각색의 약속이나 규칙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대위법' 이라고 하며, 이 때부터 다시 약 3백년동안을 '대위법 음악의 시대'라고도 한다.


중세에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장중한 합창음악 외에 '음유시인'이 활약하였다. 자기가 시를 짓고 곡을 만들어 스스로 하프를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여러 나라를 편력하는 시인들은 먼 고대 그리스가 번영했던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것이 유럽 전 지역, 특히 북구 제국에까지 퍼진 것은 7세기 경부터 12, 13세기에 걸쳐 가장 성하였다. 

 

특히 기사도가 화려했던 10세기 이후에는 종교적인 의미도 더해져서 여러 나라의 귀족이 스스로 이 음유시인으로서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프랑스의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젱거, 영국의 민스트럴 등은 모두 이 시인들의 명칭이다.

 

이들은 주로 귀족이나 기사 등 상류 사회의 사람이 하는 일이었지만, 15세기 경이 되면 독일의 시민들 사이에서 마이스터징거라는 즉홍시인이 나타났다. 마이스터라는 것은 평소에는 거리의 제화점, 재봉소, 금속 장식품점 등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당시 이러한 장사는 모두 도제 제도였으으로 우두머리와 직공, 도제의 관계는 가족과 같은 사이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곳곳의 중소도시에서 그 우두머리들이 노래의 콩쿠르를 열면 도제들은 모두 자기의 우두머리를 응원하여 떠들썩한 노래시합이 된다.

 

그 중에서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가장 성대하게 이 노래 시합이 행해졌으므로, 후에 바그너는 이것을 제재로한 악극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만든 것이다.

 

흔히 우리 나라에서 노래제목에 마이스터징거를 '명가수'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런 의미로 보면 잘못이며, 마이스터징거는 그 '우두머리 가수'라는 뜻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생긴것이 아니므로 그 노래의 내용도 시민 생활과 밀착된 제재가 선정되고, 그 시나 곡도 아마 당시는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교회 이외의 음악, 즉 속악이 성해진 사실은 이윽고 유럽의 음악 문화가 화려하게 발전하는 데 대한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건축을 비롯하여 회화, 조각 등의 조형미술에 그 정신문화의 융성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 고장에서는 신예술파(아르스 노바)라는 속악의 일파가 있어서 화려한 오페라를 성하게 하고 기악을 발달시켰다. 관현악의 연주도 아직 초기의 것이지만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교회의 음악은 장엄 웅대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민중의 음악은 차츰 '즐거움'의 요소를 많이 갖추게 되었다. 즐겁고 밝은 음악에는 아무래도 교회의 합창 양식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기악이 발달하고 가벼운 반주를 지닌 단음의 노래가 환영받게 된다.

 

수백년이나 음악가들이 고심을 거듭해 온 대위법 음악은 과연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많은 가락이 항상 짜맞춰져 복잡하게 진행해 가는 음악은 아무래도 경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정교한 다선율음악에서, 명쾌한 단선율음악의 이론을 추구하려 하는 노력이 이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3) 근세의 음악

르네상스의 화려한 예술 운동은 차츰 안정되고 고정되어 갔다. 참으로 이 문화 운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유럽 전 지역에는 엄청난 예술의 재산이 축척되어갔다. 그리고 16세기를 정점으로 하여 새롭고 자유분방한 양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바로크 양식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음악 쪽에서는 플로렌스의 음악가들이 가지각색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 주었는데,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역시 답답하고 장중한 교회적인 다선율음악에서 좀더 밝고 경쾌한 단선율음악 쪽으로 옮겨 가려 하는 노력이었다. 

 

예컨데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증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부친인 벤첸초 갈릴레이는 아름다운 독창곡을 즐겨 작곡하였고 여기에 명쾌한 기악반주를 붙였다.

 

'명쾌한' 이라는 의미는, 지금까지 노래에 붙여진 반주는 모두 합창곡풍으로, 기악도 모두 대위법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갈릴레이가 시작한 단선율음악에서는 그 반주는 화성적으로, 즉 반주의 음은 옆으로 흐르는 선율의 조합이 아니라 세로로 겹치는 화음의 형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 느낌은 무척 명쾌해지고 독창과 반주가 깨끗하게 분리되어 들리게 된다.  이것은 곧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의 수법에도 응용되었고 다시 기악곡에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오페라는 캇치니에서 카발리에리와 몬테베르디, 카릿시미 Giacomo Carissimi 1650--1674) 등에서 알렛산드로 스카를랏티로 이어져 화려한 오페라로 되었고, 이것이 프랑스와 영국에 수입되어 여기에 17, 18세기의 오페라 융성 시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또 르네상스 이후 악기의 제조법이 매우 진보한 것도 음악의 새로운 양식을 낳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르간, 클라비코드, 하프시코트(쳄발로) 등도 모두 이 시대에 참으로 정교하고 새로운 것이 되고 그 연주 기술도 현저히 향상되었다.

 

바이올린을 비롯하여 그 밖의 현악기가 이탈리아의 크레모나를 중심으로 해서 활발하게 만들어졌으며, 뛰어난 대연주가가 많이 나온 것도 또한 이 시대이다. 바이올린의 명연주가로서는 비탈리가 있으며 또 소나타와 합주협주곡을 많이 만든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도, 독주협주곡을 처음으로 작곡한 토렐리(Giuseppe Torelli 1658--1709)도 모두 뛰어난 바이올린 주자였다. 

 

도메이코 스카를랏티(앞에 말한 알렛산드로의 아들)는 쳄발로의 명수였으며, 이에이어 프랑스에서는 쿠프랭 Francois Couperin 1668--1773), 다캥(Louis Claude Daquin 1694--1772), 샹보니에르(Jacques Champion Chambonnieres 1602경--1672) 등의 명인이 많이 나타나 모두들 쳄발로를 위한 명곡을 남긴 바 있다.


오르간 음악에서는 이탈리아에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 1583--1643)가 있으며 독일에는 북스테우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라는 대가가 있다.

 

한편으로는 교회음악에도 이 시대에 일대 이변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르틴 루터 일파의 종교개혁(1517년)이다. 루터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자기도 류트를 잘 연주했으며 작곡 기술에도 뛰어났었다.


당시의 교회음악은 모두 로마정교(가톨릭)가 제정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에 의해 모두 라틴어로 부르게 되어 있었다. 성가뿐만 아니라 온갖 의식이나 예배 방식도 여러나라, 여러 민족의 생활양식과는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그 규칙을 지키고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터는 민족이나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여러 민족이 제각기 사회생활에 적합한 신교(프로테스탄트)를 세웠다. 신교의 찬송가는 각각 자기 나라 말로 부르고 그 곡도 자기 나라의 민요를 다루거나 새롭고 뛰어난 작곡가를 기용하여 신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긴 예배음악 대신에 짧은 가요 형식의 노래를 채용하였다. 짧아도 이것은 유절가곡이고, 같은 멜로디로 몇장이건
되풀이하는 형이기 때문에 누구나 곧 익힐 수 있다. 그래서 정래의 교회에서는 전문가의 성가대만이 라틴어로 불렀던 것을 이번에는 교회에 모이는 대중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부를 수 있도록 고쳤다.


이러한 종교음악의 개혁은 다시 르네상스 정신의 영향과 바로크 양식의 영향도 받아서,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발전하는 길이 열였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크 양식의 시대, 또 다선율 음악(대위법)시대의 최후의 대가인 헨델과 바하의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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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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